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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 노동자와 그의 아내 그리고 다큐멘터리 감독과 그녀의 남편. 두 부부가 다큐멘터리 제작을 계기로 만나, 서로의 다른 삶과 숨은 욕망을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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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예술의 한계 속에서, 예술가는 어떤 의무를 느끼는가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
<가능한 사랑>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십계명의 10번째 구절이자, 이 영화가 출발했을 당시 기획이었던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데칼로그 재해석 프로젝트, 그중 마지막 편이었던 10편의 주제이기도 하다. 사실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정보는 단 2가지로 볼 수밖에 없다. 이 구절과, 영화의 제목. 그렇다면 우리는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고, 또 물어보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는 불륜을 다룬 이야기인가? 과연 그들이 탐한 남의 것은 무엇일까?
영화엔 4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들은 각기 다른 것을 탐하는 자였다. 영화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미옥은 부를 탐하는 자였다. 더 정확하게는, (부로 인해 실현될 수 있는) 여유와 안정을 탐한 자였다. 영화에서 미옥의 스탠스는 대부분 상수다. 그녀는 변수의 인물이 아니다. 남편 호석과는 달리, 그녀는 무엇을 입을지, 무엇을 먹을지에 대해서도 정해지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니 그녀의 그 성향이 흔들리는, 즉 상수가 변수로 변하는 순간은 그의 현재 안정과 여유가 흔들리는 순간이었고, 그가 행동하는 순간은 자신이 갖지 못한 여유와 안정이 눈앞에 아른거릴 때였다. 남편의 직장이 흔들리자 그녀는 노동자들의 가족 중 누구보다도 파업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임한 인물이었다. 남편의 직장의 위기는 곧 자신이 영위하는 삶이 흔들린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늘 잔잔한 애티튜드의 그녀가 반짝이는 순간은 예지의 명품 가방이나 진수성찬을 볼 때였으며, 그녀가 가장 행복해했던 공간은 모든 것이 갖춰져 마음껏 뛰놀 수 있는 상우의 에덴동산과도 같은 별장이었다. 변수랄 것이 일어나지 않을 공간이며, 설령 변수가 일어난다 해도 넉넉히 대처가 가능할 것 같은 공간.
하지만, 이창동은 그녀를 완고한 남편 때문에 생활이 어려워진 순진한 피해자로만 묘사하지만은 않는다. 미옥의 시점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장면이 있다. 그녀를 뒤쫓으며 촬영할 거리를 물색하는 예지에게, 미옥은 좋은 거리를 주겠다며 사장에게 다가가 노조를 만들겠다는 의사를 전달한다. 이 순간을 촬영하고 있는 카메라가 있으니 그 녹화의 힘을 등에 업어 평소 원했던 행동을 하는 것이다. 최소 인원을 충족하기 위해 사장의 딸까지 더해 겨우 세운 노조의 창립총회가 열리는 순간, 흥미롭게도 뒤에서 외국인 노동자가 그들에게 시선을 보이며 지나간다. 미옥은 직원이 3명인데 어떻게 최소 인원 4명을 맞추냐며 사장에게 따졌던 인물이다. 그런데 사실 그 3명은 한국인들만을 말한 것이었다. 미옥에게 외국인 노동자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미옥의 아내 호석은 (경제적 능력이 기반이 되면 시너지가 날) 권위를 탐하는 자였다. 영화의 첫 장면은, 호석의 아이 철이가 신발끈이 풀려 있자 이를 못마땅하게 보는 호석이 철이에게 신발끈을 다시 묶을 것을 '명령'하는 장면이다. 위계와 의리를 중요시하며, 유독 극 중에서 튀는 복장에서 느껴지듯 'Muscular'하며, 남자가 밖에서 일하다 보면 마실 수도 있는 술에 여자가 왈가왈부하는 것을 참지 못하는, 돌처럼 완고하고 고지식하며 전형적으로 전통적인 남성상이다. 호석이 신봉하는 것은 교과서적인 남성성이었다. 호석은 말하자면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스티븐 록조 같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순간은, 실업자이기에 가장으로서 자신이 선사해주지 못하는 가족의 일상적인 행복을 다른 누군가가 영위하고 있음을 목격할 때였으며, 번듯한 본래 직장이 아닌 다른 현장에서 대표로 안전구호를 외쳐달라 부탁을 받을 때였으며, 하루살이와도 같은 자신의 육신이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우월해 보이는 한 남자 앞에 던져져 있음을 인지할 때였다. 자신의 '가오'를 무엇보다 중히 여기는 그이기에 자신의 허물어진 내면이 까발려질까 두려워 심리치료를 피해 왔고, 그럴수록 더욱 썩어가는 자신의 내면이 밖으로 뿜어져 나온다면 어떤 지경에 이르게 될지 스스로도 두려워하는 자였다.
둘의 이야기를 촬영하는 예지는 이야깃거리를 탐하는 자였다. 그녀는 흥미로운 '거리'를 얻기 위해선 무엇이든 할 사람으로 보인다. 상우가 '메소드 연기'라며 지적할 만큼, 부유한 스스로의 처지와는 다른 자신의 뮤즈를 이해하기 위해 그들을 사랑하려는 노력을 하며, 그들을 호의로 대하려 하고 그들과 함께 하려 한다. 상우 혹은 관객이나 타인에게는 그것이 가장된 노력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노력이라는 측면에서 예지의 그것들은 진심인 것이다. 그녀는 목적지향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좋은 이야깃거리를 얻겠다는. 다만 그 목적 때문에 그녀의 진정성은 위태롭게 보여지는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가도 흥미로운 지점에 다다르면 이야기를 잠깐 중지시킨 뒤 카메라를 들이밀고 녹화를 하려 한다. 사실 그녀가 그들 미옥 부부를 속인 것은 아니다. 시작부터 그녀는 자신의 목적을 그들에게 분명히 고지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포를 형성하는 과정의 끝에 언제나 그것을 다시금 카메라 앞에서 재현한다거나 그것들 중 몇 가지를 취사선택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그들이 인지하게 된다면, 그때까지의 라포의 시간들은 순수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까.
그러한 그녀의 목적 지향적인 성향 때문일까. 어떤 면에선 그녀는 놀랍도록 무지한 면모를 보인다.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독립영화를 찍으러, 여유롭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를 찍으러 다니는 인물임에도 명품으로 겉을 치장한다. 보다 못한 미옥이 그래도 완곡한 톤으로 의상의 TPO를 조심스레 지적해 주자, 예지는 생각도 하지 않은 지점이라는 듯 다소간 당황하고 언짢은 듯한 표정을 짓는다. 어려웠던 과거를 이야기하는 미옥에게 호응하겠다는 심산으로, 자기도 별 볼일 없었다며 나름 자신의 어려웠던 시절을 이야기하지만, 그 어려웠던 시절은 미국에 '유학'을 간 시절의 이야기다. 공장에서 일할 적 본 예쁜 달에 대한 기억을 말하는 미옥에게 공감한다며 자신의 달에 대한 기억을 말하지만, 그것은 미국에서 유학을 하던 중의 순간이었다. 예지는 의도치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 지점에 대해 무지한 것이다.
그리고 한 명의 인물이 남는다. 예지의 아내 상우다. 사실 이야기의 중반까지 그는 별다른 탐하는 것이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사실 더 탐할 것이 있을까 싶을 만큼 그는 부유한 인물이다. 탐하는 자보단 일견, 아내 예지와 마찬가지로 무지한 자에 가까워 보인다. 그 무지함은 악의로 인함이 아니다. 태생적인 높낮이의 차이로 인해, 미처 인지를 못하는 무지에 가까운 것이다. 휘슬을 부르면 언제든 내 친구는 달려왔다며 바쁘게 달려오는 별장 직원을 소개하는 상우. 상우의 시선에서 그는 자신의 영원한 친구인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이의 시선에서는 권력을 쥔 자의 실없는 유희로 보인다. 그 태생적인 권력은 그의 성향을 처음부터 결정해 놓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분명히 예의 바르고 모든 면에서 나이스하지만, 왠지 모르게 타인을 내려다보는 듯한 어투와 표정들. 더욱이 우리는 미옥과 호석의 시선과 자주 동기화되기에, 그들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상우는 미묘한 구석이 있다. 그야말로 상우는 '나이스한 개xx'다.
그렇게 본다면 유독 튀는 상우의 두 행동이 있다. 호석을 따라 방바닥에 방뇨하는 순간과, 전라의 미옥을 덮치려 하는 순간일 것이다. 우리는 흔히 방뇨를 미성숙한 아이들의 장면이라 해석한다. 인사불성인 호석이 자신의 방바닥에 방뇨하는 것을 본 상우는 우선 당황하지만, 이내 웃음을 지으며 그의 곁에 서서 함께 방뇨를 한다. 물론 그 행동에는 다소간 조롱의 뉘앙스도 묻어난다. 그러나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상우가 그 행동을 자신의 의지로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단순히 호석의 행동을 무심코 따라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그 행위에 동참했다는 인상이 강하게 남았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전라의 미옥을 덮치려는 전라의 상우의 장면 또한 이질적이다. 유년 시절 전라의 상태로 이곳에서 수영을 즐겼다는 상우의 회상에, 그것이 자유를 느끼기 위한 행동이었다며 그의 말에 유일하게 호응하던 미옥이, 자신도 그런 자유를 느끼려는 듯 전라의 몸으로 수영을 즐긴 뒤 해변으로 나오자, 마치 짐승이 원초적으로 육체를 탐하듯 그녀에게 다가간다. 매너를 지키고 인텔리한 사회적 동물로서의 면모를 뽐냈던 지금까지의 모습과는 정반대로, 자신의 본능이 향하는 대로 향하겠다는 듯. 상우는 무엇을 탐하는 자였는가. 상우는 자유를 탐하는 자였다. 본능은 그에게 자유다.
이렇게 보면 두 인물이 이어지는 듯 보인다. 호석과 예지, 그리고 미옥과 상우다. 호석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주저해 왔다. 미옥에게도 하지 않았고, 고심 끝에 참여한 심리 치료 자리에서도 끝내 자리를 떴다. 예지가 자신들을 촬영한다고 했을 때도, 호석은 카메라 앞에서 인터뷰하는 것만은 계속 피해 왔다. 그러나 결국 예지가 세팅한 카메라 앞에 앉아 자신의 이야기를 두 차례 고백할 때, 호석은 지금껏 누구 앞에서도 하지 못한 내면의 고백을 토해내고, 또 눈물을 흘린다. 내내 혈이 막혀 있는 듯했던 인물인 호석이, 단순히 내면을 고백한다는 형태를 넘어서 본인의 어떤 응어리를 밖으로 내보내며, 스스로의 상황을 처음으로 제대로 응시하는 순간인 것이다. 그것은 미옥에게 있어 일종의 위기감이었을 것이다. 배우자인 자신도 하지 못했던 것을 하는, 나보다 그를 더 잘 다루는 듯한 그녀 예지. 우연히 그 순간을 목격한 미옥이 당황한 이유도, 호석을 잡고 떠나자고 황급히 말한 까닭도 그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옥과 상우의 관계는 어떠한가. 그들의 관계는 전자의 관계보다 더욱 의미심장하다. 그들 둘만 남겨진 몇 번의 순간에서 다소간 유사 연인의 뉘앙스가 풍긴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본작에서 그 교감의 뉘앙스는 흔히 이야기하는 불륜의 모티프보다, 더욱 미묘하면서도 희미한 듯한 지점에 발을 디디고 있다. 그야말로 그것은 상대방이 필요했던 것을 채워 주는 퍼즐의 관계처럼 보이는 것이다. 미옥은 여유와 안정을 원했고, 부유함을 넘어 재벌의 영역에 있는 상우는 그것을 갖고 있었다. 상우는 어린아이와도 같은 자유를 원했고, 여전히 아이처럼 도로를 횡단하면서 노래를 흥얼거릴 줄 아는 미옥은 그것을 갖고 있었다.
다만, 대안적인 두 관계 역시 완전한 형태로 이루어지지는 못한다. 호석과 예지의 관계는 미옥의 '개입'으로 인해 중지되고, 미옥과 상우의 관계 역시, 상우가 자유의 영역을 넘어 짐승의 본능으로 향하려는 순간으로 인해 거칠게 중단된다. 다시금 호석은 과묵해지고, 예지가 세팅한 카메라 앞에서 만들었던 그 소통의 순간을 이후 미옥과는 (적어도 영화 안에서는) 만들지 못한다. 상우 또한 미옥으로 인해 오랜만에 켜진 본능이자 자유의 스위치가, 완전한 형태로 이루어지지 못한 채 끝나자 그것을 아쉬운 대로 풀기라도 하는 듯 예지와의 성관계를 가진다. (그 순간의 대상이 누군가보다 중요한 것은 상우의 해소 욕구이기에, 기술적으로 이 장면은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아보기 불편하게 조명을 사용했다.) 오늘따라 달랐다는 예지의 말에 상우는 나는 나라고 대답한다. 짐승의 모습. 상우의 말대로 그것도 상우가 맞다. 다만 배우자인 예지도 처음 느꼈을 정도로 이제껏 꼭꼭 숨겨 두었던. 그 짐승의 모습은, 예지보다 미옥 앞에서 먼저 공개된 것이다.
<가능한 사랑>의 인물들은 제각각 무지했다. 호석마저도, 그는 인간의 이기심에 대해 무지했던 자이기에 말이다. 이 무지의 지점을 이창동은 '악'이라며 낙인찍고 정죄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것이 인간의 불완전성이라며 이창동은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불완전성은 인간에게 한계를 안긴다. 인간은 타인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는.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관계에선, 서로의 필요한 것을 채워 주는 형태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을까 라며 이창동은 묻는다. 그 필요한 것이 욕망이거나, 그 사랑의 형태가 사회가 합의한 형태의 것이 아닐지라도.
이렇듯 영화의 중심인물을 미옥으로 두고 보는 시선이 있는 한편, 영화의 주인공을 예지로 놓고 본다면 <가능한 사랑>은 아마도 한국 영화계에서 가장 순수한 예술가에 가까울 거장 이창동의, 예술을 창작하는 데 있어 생겨났던 고뇌의 시간들에서 출발한 영화처럼도 읽힌다. 이창동은 자신이 가진 여러 고뇌와 번민들을 사실상 예지라는 인물로 녹여낸 것처럼 느껴진다. 예지는 흥미로운 인물이다. 부유한 수준을 넘어 재벌에 가까운 자 상우와 결혼한 자임에도 남편의 경제적인 지원을 전혀 받지 않은 채 영화 제작에 필요한 지원금을 얻기 위해 문화예술지원사업에 공모한다. 그러면서도, 상술했던 대로 명품을 휘감고 패셔니스타의 복장으로 곳곳을 누빈다. 예지의 프로젝트를 돕는 스태프들은 말한다. 진짜 돈 없는 사람들에게 가야 할 지원금이 저 사람에게 가는 게 맞나 싶다고. 사실, 예지의 행적이 나쁜 것은 아니다. 독립영화를 찍는 인물이 명품을 휘감았다고, AI가 인간을 대체하고 있는 이 시점에 우리 시대 노동자들의 현실을 주목해 보겠다는 예지의 기획이 진정성 없는 것은 아니다.
재벌 남편과 결혼했음에도 영세한 예술가들을 위한 기회에 지원하는 예지를 사람들은 욕하지만, 그것에 있어 예지가 부정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도 알고 우리도 안다. 그녀는 자본의 힘 밖에 있는 인물이 절대 아니라고. 그리고 그녀는 모를 수도 있다. 돌아갈 곳이 있으니 독립영화도 찍으러 다닐 수 있는 것인 걸.
영화는 얄궂은 예술이다. 혼자서 작업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며, 예술의 영역에 포함되는 분야임에도 자본에 종속되어 있다시피 하다. 그래서 영화라는 예술에선 타협이라는 단어가 유독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예술가와 타협이라는 말은 쉽사리 붙지 않는 단어이지만, 영화는 타협이라는 영역이 필수불가결처럼 느껴지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영화는 체념에서 출발하는 예술일지도 모른다. 영화를 만들기 위해선 현실적인 부분에서의 '사전 준비'가 필수적이고, 그 지점에서 여러 가지 타협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번민하며 스스로 묻게 되는 것이다. 타협으로 인해 최초의 순수성이 훼손될 수 있다면, 그 훼손된 순수성을 계속 가져가면서까지 영화를 만들 자격이 있는 것일까?
제작 과정에서는 또 새로운 고민거리가 존재하게 된다. 세상의 어떤 단면을 포착해 예술의 영역에서 재구성한 작품으로 인해 사회에 화두를 던지는 것이 예술가의 역할이라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어떤 바를 위해 순간을 '선택'해 촬영하고, 현실의 그들은 원하지 않았던 순간을 예술이라는 명목 하에 카메라 안에 봉인켜 놓는다면, 그것은 착취의 또다른 이름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의견 앞에서 예술가는 과연 당당할 수 있는 것일까. 흥미로운 거리가 생겼다며 집을 취재하다시피 하고, 불편한 집의 분위기 때문에 창고 안으로 숨는 아이 철이의 모습을 코앞까지 굳이 쫓아가 카메라 안에 담는 스태프의 모습은, 좋은 의도가 창작의 과정을 어디까지 면죄해줄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영화는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반영의 현실이다. 실존하는 누군가를 대상으로 삼고, 그들의 상황과 심정을 이해하려 모든 노력을 기울여도, 그것은 명백한 한계를 불러온다. 인간은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영화라는 것은 결국 감독이라는 제 3자의 시선을 통해 선택되고 해석되고 배열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유독 이질적으로 아름다운 영상과 카메라워크로 미옥의 과거 회상이 삽입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것은 아마도 예지라는 제 3자가, 미옥의 이야기를 듣고 스스로의 머릿속에서 상상한 이미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예지는 미옥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머릿속에서 현실보다 더했을 이상향을 그려내는 것이다. 미옥의 과거가 아름답지 않았다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타인에 의해 한 번 씌워진 필터는 이처럼 이질적인 것이다.
<가능한 사랑>은 예술에 대해, 그리고 특정한 사건에 대해 오랫동안 가져왔던 이창동이라는 한 인물의 고민이 끝내 해소되지 못하고, 천착과 자학의 흔적만 남기고선 곪아터진 심리가 형상화된 영화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그 미완의 고민이 나는 좋다. 예술가는 모두 알고서 작품을 만드는 인물이 아닌, 자신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일지라도 그것에 다가가 질문을 던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창동의 이번 여정이 그의 필모그래피에 있어 <버닝>처럼 전진의 뉘앙스는 아니다. 오히려 되돌아봄에 가깝다. 그러나 여전히 그를 지지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