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번째 데뷔작이라 불리는 <남국재견> 이전까지 허우 샤오시엔의 테마는 관조였다. 지독할 정도로 관조하며 앞으로 다가가 개입하지 않았다. 많은 감독들이 카메라의 연출을 통해, 때론 클로즈업으로, 때론 숏-역숏으로 등등,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상황에 개입한다. 그러지 않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와 개인의 파란만장한 이야기인 <희몽인생>을 만들며 허우 샤오시엔도 여느 감독처럼 하고 싶지 않았을까. 그러나 허우 샤오시엔은, 피를 나누진 않았지만 가족이었던 자들이 이별하고, 그들이 부당한 일을 당하고, 때론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할 때조차, 감정을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때론 털썩 주저앉아 울부짖는 모습보다 어금니를 깨물며 눈물을 숨기는 모습이 더 슬프게 보이기도 한다.
또한 영화가 '시간의 흐름' 이 아닌 '순간의 사건'으로 기억될 여지를 차단한다. 이를테면, 변발을 자르는 장면을 영화에 등장시키지 않는다. 그저 지나가는 장면에서 그들의 바뀐 헤어를 슬쩍 담아낸다. (아버지의 죽음을 제외한) 가족들의 죽음은 구술로 전달한다. 본작에서 그나마 가장 '순간'스러운 장면은, 티엔루가 (아마도 처음으로) 평화롭게 국수를 식사로 먹는 장면일 것이다. 그마저도 이야기의 어떤 결정적인 순간이 아닌, 사실상 데드타임에 가까운 장면이다.
<희몽인생>은 카메라의 위치, 플롯, 가족사, 많은 면에서 직전 작품인 <비정성시>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비정성시>만큼의 '냉'함은 없다. 조금 더 인간적인 온기가 느껴진다. 할머니가 죽고,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가 죽고, 막내아들이 죽어도, 그래도 남아 있는 자들은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듯. 부딪히고 흔들리며 휩쓸리는 삶을 엄숙하고도 위엄 있게 담아낸다.
<비정성시>가 개인보다 역사에 무게를 둔다면, <희몽인생>은 역사보다 개인에 조금 더 무게를 둔다. <비정성시>가 역사라는 거대한 파도가 개인을 쥐고 흔든다면, <희몽인생은> 인물이 역사에 휩쓸려가기도, 역사와 무관한 삶을 살아가기도 한다. 노인의 입으로 전하는 <희몽인생>의 엔딩이 애상적인 아이러니를 선사하는 이유다. 티엔루의 공연을 보기 위해, 아마도 전투에 썼을 비행기를 부숴 알루미늄을 모아 돈을 마련한 주민들. 신령님에게 감사함을 돌리며, 그 신령님 덕분에 대만이 일본에서 해방되었다는 주민들. '새옹지마'를 표현한 훌륭한 영화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