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 영화가 픽션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이 무렵 이란의 대지진이 있었고,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 등장했던 아역 배우들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그들이 사는 지역으로 가 보았다는 실제 사례가 있었고, 그 사례를 영화의 각본으로 삼아 자신 역할을 할 배우와 자신의 아들 역할을 할 배우를 '세워' 영화를 촬영한 것이다.
그렇지만 차창 밖으로 보이는, 페허가 된 이란 도시의 풍경들. 이것들마저 (픽션의 일환인) 세트장은 아닐 것이다.
영화에 엑스트라처럼 지나가는 사람들은 카메라를 의식하며, 섭외된 엑스트라라고 하기엔 그들에게 미안해야 할 정도로 그들의 존재만을 알아차릴 정도의 파편적인 숏들. <그리고 삶은>은 픽션과 논픽션이 절묘하게 혼재되어 있다.
흥미로운 숏 하나를 보자.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 출연한 '루히'라는 노인을 여정 도중 만난 주인공 일행. 그를 집에 데려다 준 이후 재미있는 장면이 펼쳐진다. 노인은 대뜸 카메라에 대고 물그릇을 찾는다. 공간 상 주인공에게 요청한 것은 아닐 터. 그러자 지금껏 등장하지 않았던, (그야말로 돌발상황같은) 스태프 같은 여성이 종종걸음으로 등장해 그에게 그릇을 가져다 준다. 루히를 영화에 출현시킨 것까지는 각본의 내용이었겠다 싶지만, 또 누가 아는가? 그들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와중 그를 정말로 우연히 만난 것이었을지. 그렇기에 주인공과 대화하던 루히의 말들도 덩달아 흥미로워진다. 테라스가 있는 집에서 사는 줄 알았다는 말에 "그건 영화 속에서 내 집이었죠... 솔직히 말하면 지금 이 집도 진짜 내 집은 아니에요. 내 것도 아니고.... 이것도 내 '영화 속 집'이에요. 할아버지 집으로 할 거라고 그 사람들이 그랬거든. 내 진짜 집은 지진으로 무너졌어요." "이 집만은 살아남았네요, 이게 사실이죠." 라며 다시금 호응하는 주인공의 말에 다시금 대답하는 루히의 말 또한 일품이다. "네 그렇네요. 맞는 말씀이에요. 영화도 거짓을 넘어 현실이 되기도 하죠." 루히의 이 모든 말 또한 키아로스타미가 그에게 부여한 대사일수도 있다. 그렇지만 정말로 루히라는 노인이 저 순간 실제로 뱉는 대사일 수도 있겠지 않은가.
한편 <그리고 삶은>은 로드 무비의 형태를 띄지만, 도저히 로드무비라고 수식할 수 없을 만큼 엉망인 것이 그들의 여정이다. 그들은 코케르로 가려 하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그 길을 잘 알지 못하고, 그들 또한 앞길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이 길이 맞냐고 묻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모든 길은 연결되어 있다고 답변하지만, 막다른 길이면 어떡하냐는 아들의 이어지는 질문엔 대답을 하지 못한다. 어쩌면 그들의 여정이 당시의 이란 사회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현재의 좌절 앞에서 멈추고만 있기보단, 앞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감독의 마음을 엿볼 수 있겠다. "이제 어느 길로 가?"라는 아이의 말에, "길을 찾아내야지."라며 답하는 아버지처럼.
이란 대지진이란 사건을 정면으로 다룸에도, 감독의 주안점은 사건의 비극보단 사건 이후다. 마치 리포터처럼 사람들에게 과거와 현재의 삶을 물어보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그리고 삶은>이 비추는 것은 비극에 주저앉고 삶을 내려놓은 채 엉엉 우는 자들이 아닌, 자신에게 주어진 삶과 현재를 살아내는 자들이다. 물론 그렇다 하여 감독이, "여러분! 이것이 삶의 정답입니다!" 라며 외치진 않는다. 그저, 소박한, 최소한의, 겸손한 수준에서의 공감과 동조를 보내는 것이다. 지극히도 멀리서 관여하지 않은 채 오랜 시간 동안 주인공을 지켜보는 영화의 엔딩은 그래서 이 영화의 설득력을 굳건하게 만든다.
25.11.24 재감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