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감독의 개인사를 아는 것이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데 어느 정도까지 필수적일 수 있을까? 또한, 한 감독의 개인사는 그의 작품에 어느 정도의 이점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 그러한 전사가 있어야만 영화가 완전해지는 것은 아니며, 그러한 외부 이슈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영화가 과연 좋은 영화인가에 대한 논의는 필요하겠지만, 자파르 파나히라는 인간을 탐구하지 않은 채 그의 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이 언뜻 부당한 접근으로까지 보인다는 감정이 드는 것을 숨기고 싶지는 않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작품 <택시>는 영화 제작 금지를 당한 그가 좌절하지 않으면서도 감시를 피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만들어낸 작품이다. 영화의 모든 상황은 운전대를 잡고 택시가사로 변신한 자파르 파나히라는 인물이 실제로 겪는 실제 상황처럼 보인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본작에서 자파르 파나히 역할을 맡는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본작은 다큐멘터리를 '지향'한다. 그 뜻이 본작이 곧 다큐멘터리라는 소리는 아닐 것이다.
탐구해보자면 택시에는 모두 4대의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블랙박스와 같이 정면을 비추는 1번 카메라, 운전석에 앉은 파나히 감독을 비추는 2번 카메라, 조수석을 비출 수 있는 티슈통에 숨겨놓은 3번 카메라, 뒷좌석을 비추는 4번 카메라. 하루 동안에 일어나는 일들치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이 이제껏 말해 왔던 이야기들이 모두 '승객'들의 입에서 들린다는 것이 의미심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됐든 '공식적으론' 다큐멘터리의, '영화가 아닌' 영상들이기에, 아마 그들은 '배우'였겠지만, 그들이 본작을 통해 '우연히 탑승한 일반인'의 탈을 쓰게 되면 그들의 말은 감독의 사상이 아니라, 단순히 개인의 의견이거나 테헤란 시민 중 한 사람의 생각으로 받아들여진다. 정부에 저항하는 최고의 예술적 태도가 아닐까. 또한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본작이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을 빌려 어느 것에도 종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형태의 영화 한 편을 만들어냈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자신의 유언이자 유서를 '카메라'로 찍어 달라는 어떤 승객의 요청에 의해, 우연히도 그곳에 승객으로 먼저 탑승했었던 영화 애호가 '오미드'는 촬영기사가 된다. 결국 영화의 모든 순간은 텍스트로 남길 수 없으며 오디오로만 남길 수 없고,결국 카메라라는 장치를 통해야만 영화로서 남을 수 있음을 역설하는 듯이. 죽어가는 그 승객이 차에서 내린 후 "다 계획된 거죠?" 라며 자파르 파나히에게 묻는 오미드의 모습이나, 조카와 함께 '영화 만들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택시>라는 영화를 찍는 자파르 파나히의 모습은 메타 영화적으로 흥미롭다.
영화를 만들 수 없으니 영화가 아닌 (것 같이 보이는) 영화를 만들어내는 자파르 파나히. 예술가가 억압에 저항할 수 있는 가장 예술가다운 대처가 아닐까. 자파르 파나히는 거리에 나아가 촛불을 들지도 않고 우체국으로 가 전보를 치지도 않는다. 그는 또다시 자신만의 방식대로 저항한다. 영화의 마지막을 '빈 차를 습격하지만 실패한 도둑들'로 설정한 까닭이 있을 것이다. 그깟 절도로는 자신의 예술 창작을 막을 수 없다 말하는 듯, 자파르 파나히는 완곡함 속에 굳건함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