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중심 소재로 한 영화는 보기를 주저하게 된다. 한정적이고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아이'라는 소재는 영화라는 '예술 창작' 과정에서도 필연적으로 윤리의 벽에 맞부닥치게 된다. 아이는 (더 나아가 미성년자는) 영화에서 죽으면 안 되고, 죽이면 안 된다. 그들에게 어떤 성적인 코드가 씌워지면 안 된다. 물론 '법'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고, 내가 여기서 "아이를 죽이고 아이를 성적으로 사용하자!"라는 식의 운동을 벌이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한 작품의 소재로 사용되는 무언가가 위와 같이 '거칠 것들'이 많다면, 그 영화는 경직됨을 떨쳐내기 쉽지 않을 것이다.
<태풍 클럽>은 그 위험하고도 금기에 가까운 불문율에 맞서는 작품이다. <태풍 클럽>은 드물게도 소년 소녀들의 '퇴폐적인' 모습을 조명한다. 아이들을 다루는 데 전문가인 소마이 신지가 만든 작품이지만, 그의 작품에서 생경할 정도인 뚱한 관조의 시선.
속옷만 입고 춤 추는 학생들. 그들의 모습은 '아름다운 청춘'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학생들의 나체 춤이 왜인지 어른들의 음주가무와 오버랩된다. 술도 없고 문신도 없지만, 비슷해 보인다. 15년 뒤의 저 학생들의 모습이 저럴까.
청춘이라는 단어는 단어 자체만으로 편향되어 있다.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철.' 극도로 희에 가까운 의미다. 과거라는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추억이라는 이명이 붙여지며 미화되기에 청춘을 지나온 (거의) 모든 이들은 그때의 시간을 행복으로 추억하지만, 우리 시대 그 '청춘'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시기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사람들은 청춘을 청춘의 본뜻대로 지내고 있기 어려울 것이다. 더는 어리지 않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고, 공식적이며 비공식적인 경쟁에 떠내려가고 있으며, 이상과 현실의 시소 사이에서 그 경중이 점차 후자로 옮겨지는 시기일 테다.
소마이 신지는 이 시기를 '극단적인 희'로 포장하지 않는다. 이 시기는 비논리적이다. 막무가내로 행동하고, 때론 '어른'보다 더 태연하게 악을 행한다. '어른'보다 부끄러움이 없으며, 알지 못했던 감정들의 스위치가 켜지기에 이상야릇한 비(非) 텍스트적인 순간들이 불을 뿜는다. 옷들을 벗어던지며 강당과 비 내리는 야외에서 춤보다는 몸부림을 치는 장면들이라거나, 엄마를 찾으며 이불 속에 들어가 의문스러운 시간을 보내는 리에의 장면이라거나, 카츠에를 해코지하려던 켄이 그녀의 등에 채 아물지 않은 상처를 보자 무너지는 장면. 그것은 '청춘'이라는 (다소 편향되고 다소 강요된) 단어로는 모두 담아낼 수 없는 이 시기의 혼돈을 그저 바라보는 소마이 신지의 시선이다.
학생들이 광기에 휩쌓인 춤을 출 때 우메미야 선생님은 자신의 여자친구와 예비 장인/장모님과 함께 신나게 음주가무를 즐긴다. 분위기가 달아오르자 장인어른은 윗옷을 벗는다. 순간 드러난 이레즈미. 순간 그것을 보고 얼어붙은 우메미야. 그 순간 그는 '야쿠자의 모임'에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으리라. 전화로 "난 절대로 당신처럼 되지 않을 거야!"라며 소리치는 학생 미카미에게 선생님은 취한 상황에서도 분명히 말한다. 15년만 지나면, 너라고 별 수 있겠냐고. 나이 먹으면 다 그렇게 되는 거라고.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사회 생활 중 예상치 못한 상황이 닥쳐 자신이 '있으면 나까지 피해 보는 곳'에 놓여 있음을 감지했더라도, 그것을 겉으로 표현하지 못한 채 눈치를 보고 장단을 맞춰야 하는 것.
몸부림과도 같이 보이지만 어쨌든 그들 간의 연대를 이룩하는 듯 보이는 일련의 시간들이 흐르지만, 미카미라는, 말하자면 그들 중 가장 덜 불안정해 보였던 인물이 자살함으로 연대는 일순간 해체의 뉘앙스를 풍긴다. 마치 친구의 죽음을 먹고 자란 듯, 남겨진 아이는 몰라보게 키가 컸다. 그와 동시에, 그 마을을 휩쓴 태풍으로 인해 채소가 많이 팔린다고 한다. 인생의 길흉화복은 변화가 많아 예측하기 어렵다고 한다. '청춘'이라 불리는 시기는 인생 중 가장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