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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서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책을 읽고 있는 실업자 알리 사브지안에게 어느 상류층 여인이 말을 걸어온다. 알리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바로 마흐말바프라고 거짓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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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거짓된 사실이 기록되고, 가장 순수한 진실이 연기되었다.
매우, 매우 논픽션 같다.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사는 중요하지 않은 잡담처럼 흘러가고, 택시 기사의 시선을 따라온 카메라는 기자 파라즈만드를 좇아 아한카의 집으로 들어가는 대신, 경찰과 파라즈만드를 기다리며 낙엽을 차거나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 택시 기사를 응시한다. 집 내부의 '체포'라는 극적이고 매혹적인 장면을 위해, 기자보다 먼저 집 안에 들어가 그들을 맞이하는 숏을 미리 찍어두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키아로스타미는 그 방법을 택하지 않는다. 서사적 정보값이 0에 가까운, 아마도 할리우드 영화에선 가장 먼저 잘려나갈 장면들이다. 그런데 바로 그 무목적성이 선언이다. 이 초반부는 키아로스타미가 본작을 어떤 형식의 영화로 만들 것인지를 못 박는 시간이다. 가장 극적인 사건이 벌어지는 그 순간에 카메라를 정점에서 떼어내고, 사건의 바깥, 그 죽은 시간에 머무르겠다는 선언. 사건을 직접 들이밀어 관객을 끌고 가는 대신, 사건의 주변을 응시하겠다는 태도의 표명이다.
그런데 그런 선언이 무색하게, 오프닝에서 끝내 보여주지 않았던 그 체포의 순간이 중반부에 이르러 버젓이 등장하는 게 아닌가. 드디어 관객이 기다려온 순간이 밝혀지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사실에 주목해야만 한다. 이 '체포의 순간'은, 아한카 가의 차남 메흐다드의 법정 증언 도중에 끼어드는 플래시백의 형태로 제시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것 역시 메흐다드의 증언이며, 메흐다드의 주관이 개입된 장면이라는 것이다. 다큐의 작법으로 흘러왔기에 강력한 신뢰성을 지녔던 전자의 시퀀스에서, 우리는 정작 사건을 목격하지 못했다. 카메라가 집 밖에 남겨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반부에 다다라 비로소 목격한 그 사건은, 메흐다드의 주관이 섞인 플래시백이라는 불완전한 형태일 뿐이었다. 한 번은 카메라가 사건의 바깥에 머무름으로써, 한 번은 사건이 한 사람의 기억을 통과함으로써. 어느 쪽도 우리에게 사건을 직접 건네주지 않는다. 이 이야기의 가장 극적인 사건을, 우리는 단 한 차례도 온전한 형태로 보지 못했다.
여기서 이 영화의 비화를 말해야만 할 것 같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감독은 판사를 설득해 사브지안의 무죄 판결을 이끌어냈다고 한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사브지안과 마흐말바프가 첫 만남을 갖는 것 역시 연출의 결과물이다. 즉 키아로스타미의 카메라는 이미 일어난 사건을 수동적으로 기록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다루는 그 사건의 진행에 개입하고 그것을 빚었다.
재판 장면도 마찬가지다. 영화의 나머지 장면이 35mm 필름으로 촬영된 데 비해, 재판 장면은 16mm 필름으로 촬영되어 마치 실제 재판이 그대로 삽입된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영화 속 재판에서 사브지안의 대사는, 실제 재판에서의 그의 발언을 토대로 재구성한 각본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가장 다큐멘터리처럼 보이는 그 구간조차 사실은 빚어진 것이다. 다만 한 가지를 놓쳐선 안 된다. 그 대사가 '그의 실제 발언을 토대로' 했다는 것. 키아로스타미가 대사를 추려 배열했을지언정, 그 말들은 본래 사브지안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작가는 키아로스타미일지 모르나, 목소리는 사브지안의 것이다. 가장 연출된 것처럼 보이는 그 진술이, 동시에 가장 진실한 사브지안의 것일 수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사브지안이 처음 마흐말바프를 사칭하던 순간이 플래시백으로 등장할 때, 그는 자신이 실제로 저질렀던 사칭(연기)을 〈클로즈 업〉이라는 영화 속에서 다시 연기한다. 진짜 사칭범이 카메라 앞에서 '마흐말바프를 사칭하는 사브지안'을 연기하는 것이다. 사칭의 사칭, 연기의 연기. 예술가가 되고 싶었으나 경제적 곤궁으로 꿈을 접어야 했던 사브지안은, 마흐말바프라는 그 '역할'을 한 번 해 보고 싶었다고 주장한다. 현실의 그는 아내와 이혼한 실업자였고, 집으로 돌아오면 그 역할을 벗어던진 채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마흐말바프의 역할을 입는 순간, 그는 존경을 받았고, 자신이 영화에 대한 사랑을 늘어놓아도 사람들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으며, 아들에게 무엇이라도 사 줄 수 있을 만큼의 돈도 얻을 수 있었다. 사칭으로 얻은 그 자리에서, 비로소 그의 예술 사랑은 발화될 자리를 얻었다.
사칭이 길어지자, 그는 자신이 실제로 그 감독이라고 믿게 되었다. 더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이 새 인물이 되었다고 그는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마흐말바프의 옷을 입고 그가 한 행동 ― 이를테면 스스럼없이 사람들과 어울리던 태도 ― 에도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는 점이다. 참된 예술가는 스스럼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 사브지안은 '영화 감독'이라는 직업을 자기 식으로 '해석'한 것이다.
고통받던 한 인간이, 사칭을 통해 자신의 삶을 예술의 무대로 만들었다. 그리고 키아로스타미는 〈클로즈 업〉을 통해 그 꿈을 또 한 번 이루어준다. 이번엔 배우가 되는 길로. 자신의 삶을 영화 촬영을 통해 다시 반복하는 것이지만, 이제 그는 배우라는 역할로 한 예술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플래시백으로 제시되는 '체포의 순간'에서, 사브지안은 멋진 연기를 보여준다. 그의 꿈이 〈클로즈 업〉에서 구현되는 순간이었을 테다.
그리고 마침내, 실제 마흐말바프가 등장한다. 키아로스타미는 출소한 사브지안이 마흐말바프를 만나는 순간을 멀리 떨어진 곳에서 촬영했다. 이 순간은 사브지안이 실제로 출소한 순간을 담은 장면이라고 한다. 예상치 못하게 우상과 마주친 사브지안은 오열한다. 이 장면은 실제의 순간인가? 그러나 이 역시 키아로스타미라는 감독이 그 순간을 의도하고 세팅한 결과물이다. 제작 비화에 따르면, 사브지안은 우상을 만나 들떠 이 얘기 저 얘기를 쏟아낸 반면, 마흐말바프는 미리 준비한 대본대로만 말을 하는 바람에 녹음본을 그대로 쓰기 어려웠고, 키아로스타미는 궁여지책으로 마이크가 제대로 수음되지 않았다는 설정을 차후에 삽입했다고 한다. 한 사람은 진짜로 무너지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준비된 대사를 읊고 있는 것이다. 사브지안의 눈물은 실제였겠지만, 그것을 둘러싼 모든 것은 세팅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마흐말바프가 사브지안을 태우고 오토바이로 아한카의 집을 찾아갈 때, 카메라는 멀리서 그들을 따라갈 뿐이며, 출소 이후 아한카를 마주한 사브지안은 멈출 줄 모르고 눈물만을 쏟아낸다. 그것을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는 카메라. 무엇보다도 실제의 순간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영화의 맨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한 번 더 놀라운 순간을 맞이한다. 바로 그 사브지안을, 아한카의 집 내부에서 바라본 숏으로 영화가 끝난다는 것이다. 마흐말바프가 사브지안과 동행한 일련의 과정이 그 순간에만 일어난 실제였다면, 도대체 아한카의 집 안에 있던 카메라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 마지막 숏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몰래 찍은 그 영상과 같은 출처일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한쪽은 길 위의 먼 거리에 있고, 다른 한쪽은 가족의 집 안이다. 위치가 물리적으로 양립 불가능하다. 그러니 이 마지막 숏은 별도로 세팅된 카메라가 찍은, 연출된 숏이다. 무엇보다 실제처럼 느껴졌던 그 마지막 재회조차, 결국 누군가 카메라를 놓아둔 자리에서 구성된 것이라는 사실. 영화는 가장 진실하게 느껴지는 그 순간에, 슬그머니 자신의 연출을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가 맨 처음 했던 선언으로 되돌아온다. 오프닝에서 카메라는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사건의 바깥에 남았다. 그런데 영화의 끝에서는 정반대로, 카메라가 마침내 집 안으로 들어간다. 시작에서 들어가지 않았던 그 문을, 끝에서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이 영화는 한 번도 우리에게 사건을 직접 보여주지 않았다. 가장 극적인 체포도, 가장 다큐멘터리 같던 재판도, 가장 실제 같던 마지막 재회도. 사브지안이 거짓(사칭)을 연기함으로써 자신의 진실에 닿으려 했듯, 키아로스타미는 모든 것을 세팅하고 연출함으로써 사브지안의 진짜 눈물에 닿는다. 사브지안의 눈물은 실제다. 그러나 그 눈물은, 오직 키아로스타미가 빚어낸 세팅 안에서만 우리에게 도착한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통해 키아로스타미가 끝내 말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관객을 향해 "네가 진실이라 믿었던 것들은 실은 다 연출이었다, 그러니 속은 것이다."라고 폭로하려는 것인가. 정반대다. 그것은 이 영화를, 그리고 이 감독을 가장 크게 오해하는 길이다. 냉소주의자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네가 진짜라 믿은 그 눈물? 세팅이다. 그러니 그 감동은 가짜였다." 여기서 멈추면 남는 것은 허무뿐이다. 그러나 키아로스타미가 말하는 것은 정반대다. 그 눈물은 연출된 자리에서 흘렀다. 그런데도 ― 아니, 그렇기 때문에 ― 진짜다. 그는 진짜를 취소하지 않는다. 진짜와 연출이 양립한다는 것을, 나아가 연출을 통해서만 그 진짜에 닿을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그가 부수려는 것은 관객의 감동이 아니라, 진짜와 가짜를 갈라놓는 그 칼 자체다. 진실과 허구는 애초에 대립하지 않는다. 그 둘을 갈라 세우고 "진짜만이 가치 있다"고 믿는 습관이 틀렸을 뿐이다. 사브지안을 보라. "진짜냐 가짜냐"의 법정 논리에서 그는 그저 사기꾼이다. 가짜 마흐말바프, 거짓말쟁이, 유죄. 그러나 그 거짓말 속에 있던 영화를 향한 사랑은, 인정받고 싶다는 그 갈망은 가짜였는가. 그것은 그 무엇보다 진짜였다. 가장 거짓된 행위 속에 가장 진실한 것이 깃들어 있었다. 진짜와 가짜로 사람을 가르는 그 칼은, 사브지안 같은 인간을 영원히 베어낼 수밖에 없다. 키아로스타미는 그 칼을 부러뜨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자기 영화의 연출을 굳이 드러내는 순간들 ― 사건의 바깥에 머무는 카메라, 끊기는 사운드, 마지막에 집 안으로 들어서는 시선 ― 은 "꿈 깨라"는 폭로가 아니라 하나의 고백이다. 나 역시 거짓을 빚어 진실에 닿는 자라는 것. 그러니 감독은 사브지안을 단죄하는 자리에 서지 않는다. 오히려 그와 같은 자리에 선다.
결국 키아로스타미가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말하는 것은 이것이다. 영화는 거짓말이다. 카메라는 자르고 잇고 빚는다. 단 한 순간도 순수한 현실인 적이 없다. 그러나 바로 그 거짓말의 기계를 통해, 우리는 사브지안의 진짜 눈물에, 그가 평생 누구에게도 받지 못한 경청에, 끝내 이루어진 화해에 닿았다. 영화라는 거짓이 없었다면 이 진실들은 존재하지조차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는 진실의 적이 아니라, 진실에 이르는 유일한 통로다. 키아로스타미가 매체의 인공성을 끝내 감추지 않는 것은 그것을 비웃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 인공성이야말로 진실을 낳는다는 것을 경배하기 위해서다. 그는 "꿈에서 깨어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꿈과 현실이 처음부터 하나였다고 말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