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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개발이 되지 않은 작은 산골 마을에 글램핑장 설명회가 열린다. 도시에서 온 사람들로 인해 타쿠미와 그의 딸 하나에게 소동이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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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엔 양덕창, 한 손엔 기요시를 들고, 전인미답의 경지를 개척하는 하마구치 류스케
하마구치는 제목에 담긴 뜻은 마땅히 없다 이야기했지만, 영화를 모두 보고 나면 관객은 악이란 무엇인가 숙고해 보게 된다. <악존않>에 등장하는 것들 가운데 진정한 백 퍼센트로서의 악이 있는가? 물론 영화를 곱씹으면 한 명이 떠오르긴 한다. 컨설턴트다. 다만 그의 행동은 한편으론 '직업 의식'에 기초한 발언들이기에 그러한 것을 '악'이라 단정하기엔 무리가 있고, 무엇보다 비대면 영상통화로 인해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관객에겐 보이지만 그에겐 보이지 않는, 죽상이 된 엔터사 남자의 표정) 장면을 만들어 풍자의 대상으로 남을 뿐이기에 그를 영화의 절대적 빌런으로 상정할 순 없겠다.
영화의 초반 글램핑장 조성 주민 설명회 장면에선 명백한 악역으로 상정되는 타카하시와 마유즈미는 이후 직장에서 상사에게 고통받는 장면을 통해 그저 우리네 사회에 산재해 있는 불쌍한 직원들일 뿐이라는 진실로서 드러난다. 재차 마을을 방문하는 중에서의 둘의 대화 장면은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인간은 선도 있고 악도 있으며, 선처럼 보일 때도 있고 악처럼 보일 때도 있다. 마을에 재차 당도한 이후 타카하시는 진심으로 관리인에 대한 관심을 표하지만 주민들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하다. 애써 칭찬을 건네지만 퉁명스럽게 비꼴 뿐인 우동집 사장. 타카하시와 마유즈미는 안쓰럽게 보이기까지 한다. 자 이제 누가 악인인가.
반대로 영화에서 백 퍼센트 진정한 '선'은 있는가. 설명회 장면에서 주인공 타쿠미는 제법 이성적인 인물처럼 느껴진다. 이 마을의 시작은 '개발지'였기에 우리 또한 외부인이며, 길지 않은 마을의 역사 동안 우리 또한 자연을 파괴해 왔고, 우리는 상생을 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렇다면 타쿠미는 이 영화에서 '선'의 현신인가?
자연의 입장에서 그는 그렇지 못할 수도 있겠다. 영화의 극초반, 타쿠마는 톱으로 나무를 벤다. 이 평범한 장면에서 카메라는 굳이 '숲의 시점 숏'에 이어 '나무의 시점 숏'으로 타쿠마를 본다. 사뭇 섬뜩하게까지 비춰지는 이 쇼트. 숲의 입장에서 이 순간은 친구의 죽음일 수도 있으며, 나무의 입장에서 이 순간은 자신이 처형되는 순간일 것이다. '땅 와사비'를 발견한 순간도 방식은 동일하다. 땅 와사비를 발견한 타쿠마는 이를 따서 먹는데 이때 카메라는 땅 와사비의 시점 숏으로 타쿠마를 바라본다. 말하자면 그 순간은 땅 와사비의 생전 마지막 순간이었던 것이다. 타쿠마가 딸 하나를 찾은 이후 발견한 죽은 새끼 사슴 그 역시도 부녀를 올려다본다. <악존않>은 자연의 시점 숏을 담고 있다. 그 시점 숏들은 약자, 피해자, 패배자의 시선이었다.
그렇지만 그 자연 역시 무조건적인 '선', '피해자'라 말할 수도 없다. <악존않>에서의 자연은 인간의 시혜로 인해 보존을 받는 '대상'만이 아니라 직접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는 '주체'로서의 모습도 보여준다. 상류는 하류에 영향을 미치며, 다친 사슴은 인간을 공격하기도 한다. 위 설명회 장면에서 타쿠마가 말한 것을 떠올려보자. 타쿠마는 어떤 '선'과 '악'으로 구분되는 인물이라기보단, "세상에는 명백한 선도 없고 악도 없으며 세상의 섭리는 균형을 맞추기 위해 선행과 악행을 번갈아간다"라는 것을 누구보다 분명하게 깨닫고 있는 존재로 보인다. 영화의 엔딩 전까지 관객과 (타쿠마를 제외한)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자연을 명백한 선이고 상생 가능한 존재라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인간이 하는 인간 중심적인 사고일 뿐. 타쿠마는 자연의 냉정함을 체감하고 있는 유일한 존재다.
그래서 나는 오프닝과 엔딩의 장면을 이렇게 느낀다. 자연은 '하늘'과 '땅'이다. 자연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땅에 인간은 두 발을 디딘 채 이것을 우리의 터전으로, 우리의 것으로 여기고 있다. 두 발 디딜 수 있는 이 '땅'에서 우리는 '땅'의 모든 곳을 속속들이 알 수 있다 생각한다. 그러나 눈을 들어 보이는 저 '하늘'을 우리는 디딜 수 없고 만질 수 없으며 가까이 가기도 쉽지 않다. 두 발 디디고 있는 '땅'으로 인해 우리는 자연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지만, 고작 눈을 들어 '하늘'을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알고 있는 (혹은 안다고 생각하는) 자연이란 얼마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것인가 깨닫게 된다.
인간은 다른 인간의 모든 면을 보지 못한다. 내가 본 모습이 타인의 모든 것이라 단언할 수 없다. 자연도 마찬가지다. 내가 봐 왔고 내가 알고 있는 자연의 풍경이 자연의 모든 것이라 단언할 수 없다. 어떤 면을 봤다면, 그 정반대의 면도 생명에겐 존재한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그 한계를 인정한다. 그 한계에 대해 말한다. 그래서일까 <악존않>의 엔딩은 섬뜩하지만 절망적이진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