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두 가지, 형식적으로와 주제적으로 나에게 강렬하게 다가오는 지점이 있다.
도그마 선언이 (대부분)지켜진 이 영화는 그 자체로 리얼과 리얼리즘의 괴상한 경계를 허무는 데 집중한다. 영화는 시도 때도 없이 붐마이크가 프레임 안에 노출되며, 촬영 감독의 모습이나 실루엣이 프레임 속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이야기 도중 급작스럽게 틈입하는 배우 혹은 인물의 인터뷰는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의 서사에 오롯이 몰입하기 어렵게끔 만든다.
영화의 인물들은 백치를 연기하지만, 우리는 백치 연기를 연기하는 배우들을 보게 된다. 마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들을 보는 듯한 이 흥미로운 충돌점은 우리가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닌, 단지 순간과 장면을 쳐다보는 것이라는 관조적인 생각마저 들게 한다.
영화의 초중반, 장애를 연기하는 인물들 앞에 실제 장애를 가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야기적으론 이 순간부터 이들의 백치 행위에 균열이 가기 시작하는 지점이지만 형식적으론 더욱 강한 질문을 던지게끔 한다.
장애인 앞에서 백치 연기를 하는 것이 옳은 행위인지, 우리는 지금까지 백치를 보며 몰입한 것인지 혹은 백치를 연기하는 인물들을 본 것인지 아니면 백치 연기를 연기하는 배우들을 본 것인지.
영화라는 매체의 구조적인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이 영화는 그래서 어떤 영화보다 위험하고 전복적이다.
인물들이 일탈의 수단으로 삼는 백치 행위는 점차 그 한계와 모순을 드러낸다. 지위를 담보로 한 백치 행위는 용납되지 않는 선을 설정케 되며, 단순한 유희와 일탈로만 기능할 뿐인 백치 행위는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카렌이라는 주인공은 이 괴상한 영화에 최소한의 안전장치이자 관객이 이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백치 행위를 즐기는 다른 인물들은 중산층에 위치하며 사회적 지위를 영위하는, 일탈을 분유하는 자들이다. 이에 비해 카렌은 가부장제와 자식의 요절로 인한 고통을 받는 노동 계층이기에, 사회 규율에서 일탈하는 백치 행위를 오롯이 전유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결말에 이르러 진정한 백치 행위를 수행할 수 있는 인물이지만, 순간의 일탈을 통한 행복의 추구가 일말에 전복되는 지점은 여전히 트리에답게, 강렬하고 멜랑콜리하다.
<백치들>의 백치 행위는 감독 스스로가 설정한 도그마 선언의 전말처럼 보이기도 한다. 관념과 규율을 전복시키는 이 일탈 혹은 혁명이 그 한계를 드러내며 종말을 맞고 결국은 그 스스로 선언을 등질 수밖에 없는.
그러나 나는 트리에의 도그마 선언을 마냥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용기를 가진 자는 많지만 용기를 실현시키는 자는 많지 않다. 카렌도, 트리에도 그래서 애정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