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주인공이 '닉슨'이라면, 아마도 닉슨 '대통령'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고, 가장 중심에는 워터게이트 사건이 있을 것이라 예상해보게 된다. 그런데 영화의 제목은 <닉슨 대통령>도 아니고 <워터게이트>도 아닌 <닉슨>이다. 이 선택은 우연이 아니라, 영화가 무엇에 집중하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제목이다. 영화 <닉슨>은 직책이나 사건이 아니라 한 명의 '자연인' 리처드 닉슨 그 자체를 조명한다.
물론 본작은 워터게이트 사건을 가장 큰 사건으로 다룬다. 영화의 오프닝은 5명의 남자가 작전 수행 중 체포되고, 대통령의 측근들이 줄줄이 사임하며, 백악관은 관련성을 부인하지만 결국 탄핵 결의안까지 회부되는 뉴스들이 연달아 들려온다. 그리고 저 모든 사건의 중심에 있는 닉슨은 어두컴컴한 방에 칩거한 채, 과거의 테이프를 반복 재생하며 거의 정신이 나간 듯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 인물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 영화는 그 해답을 찾아, 시간과 기억 속을 넘나들기 시작한다.
영화는 시간의 흐름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닉슨의 정치 인생뿐만 아니라 유년 시절까지 깊이 파고든다. 형은 말썽꾸러기였고, 아버지는 청렴했지만 패배자로 살아갔으며, 어머니는 성자 같았다고 닉슨은 회상한다. 형이 먼저 죽었을 때 그는 처음으로 '희생양'이라는 개념을 떠올리게 되었고, 그것은 훗날 자신의 당서을 가능하게 했던 '로버트 케네디 암살 사건'의 예고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영화는 닉슨이라는 한 인간의 내면 구조를 해체한다. 열등감, 두려움, 불안, 그리고 자존심. 그가 단순한 악인은 아니라는 점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여느 정치인만큼 교활했고, 정치적으로 무능하다고 하기도 어렵지만, 팀을 만들 줄 몰랐고, 내면의 열등감과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위악적인 가면을 써야 했다. 특히 닉슨에게 있어서 가장 큰 그림자 중 하나는 존 F. 케네디였다. 닉슨은 케네디에 대해 심각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고, 어쩌면 그 열등감에서 비롯된 자존심이야말로 그를 무너뜨린 가장 큰 요인이었는지도 모른다. 영화는 닉슨과 케네디 사이의 비교와 감정선을 설득력 있게 배치해 놓는다.
한 명의 인간을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해체한 영화가 있었던가? 이 영화는 단지 비판적인 시선에 머물지 않고, 군데군데 그를 이해하고 동정하게 만드는 순간들도 제시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닉슨을 다층적으로 조명하며, 관객이 그를 단순히 '추락한 대통령'으로만 보지 않게 만든다.
이 모든 감정선과 주제의 밀도를 가능하게 한 것은 각본의 치밀함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연출의 공이 크다. 인물의 내면 붕괴를 암시하듯 불규칙하게 붙는 점프컷, 감시받는 권력자의 고립감을 강조하는 CCTV 구도의 숏들, 그리고 마치 실제 자료화면 같은 흑백 영상의 활용. 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싸이코드라마처럼 닉슨의 심리적 붕괴를 표현하는 장면들은, 이 영화가 단순한 전기영화가 아님을 증명해준다. 한 인간의 내면에 깃든 혼란과 비극을 이토록 생생하게 보여주는 작품은 드물다.
그리고, 아마도 안소니 홉킨스라는 대배우의 빛나는 연기 경력 중에서도 한 손에 꼽힐 만한 명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