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세 가지 색: 블루>의 톤앤매너는 마치 어떤 잔인한 장면의 스탠스를 떠올리게 한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멜리시 이병이 독일군의 대검에 천천히 찔려 사망해 가는 장면. 과한 포장이 없고, 오히려 시간이 느려진 듯 흘러가지만 감정의 크기는 그 어떤 방식보다 거대하게 관객을 덮친다. 차분한 속도의 힘은 이렇게 크다. <세 가지 색: 블루>는 바로 그 느린 속도의 잔혹함과 감정의 파도를 한 여성의 여정을 통해 보여준다. 사고로 남편과 자식을 모두 잃은 줄리. 영화는 그 절망의 출발점에서 시작한다. 심지어 그들의 장례식조차 직접 갈 수 없어, 캠코더 중계 화면 속에서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현실. 줄리는 사건 이후, 살아야 하는 남겨진 자의 이야기를 감당해야 한다.
남겨진 자는 살아야 한다는 이 단순한 문장이 줄리의 하루를 설명한다. 그녀는 흔적을 지우고 새로운 인생을 살려 한다. 때론 사랑의 감정을 잊기 위해, 때론 공허를 잠시라도 메우기 위해 올리비에를 풋사랑처럼 이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통은 지우는 만큼 더욱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위대한 음악가 파트리스의 음악은 환청처럼 줄리를 찾아온다. 현재의 그녀에게는 고통이자, 피하고 싶지만 더는 외면할 수 없는 과거의 잔해다.
줄리는 결국 미완성된 악보를 완성해야만 비로소 과거를 놓을 수 있다는 확신에 도달한다. 영화는 이 창작의 과정을 일상의 리듬 안에 아주 부드럽게 배치해 놓는다. 이야기는 굉장히 일상적이다. 하지만 그 일상 속에서 예술이 어떻게 삶과 부딪히는지를 담아내는 방식은 오히려 ‘무쓸모함’의 미학에 가깝다.
예술은 본래 쓸모를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만, 이 작품은 그중에서도 특히나 쓸모를 거부하는 순수예술의 인상이다. 동시에 자유와 구속 사이에서 줄다리기 당하는 줄리의 서정적인 이야기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최고의 음악영화라는 인상을 받을 정도로 ‘창작’을 다루는 서브플롯이 매력적으로 흘러간다. 결국 이 영화의 감정도, 음악도, 줄리의 삶도 모두 같은 속도로 흐른다. 느리고, 잔잔하지만, 그래서 더 거대하게 다가오는 속도로.
25.11.1 아트나인 재감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