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에의 영화는 언제나 도전적이었다. 때로는 근본과도 같이 여겨져 왔던 영화의 어떤 형식들을 마치 파괴하다시피 비틀어 지금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지경을 열어젖히고, 때로는 서구 문화 속 성역을 주저함 없이 비판하고 조롱해 이 세계에 넘치는 담론을 제공했다. 그러나 한편 때로는 트리에의 그 '도전적임'이 특별함을 향한 강박처럼 느껴져 형식이 영화에 섞이지 못하고 그저 물과 기름처럼 형식 그 자체로만 남는 순간도 있었다.
<도그빌>의 후속작인 <만덜레이>는 트리에의 반짝임이 다소 희미하게 느껴졌던 영화였다. 물론 <만덜레이>에는 다른 감독에게선 쉬이 찾아볼 수 없는 참신함과 날카로움이 존재한다. <도그빌>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그레이스의 수난을 '보고도 못 보는' 주민들의 모습이었다. <만덜레이> 역시 <도그빌>과 마찬가지로 영화의 형식을 이용한 인상적인 순간이 있는데, 남성들의 샤워실 내부를 들여다 보고 싶은 그레이스의 욕망이 영화의 형식을 만나 절묘하게도 포착된 순간이다. 카메라로는 남성들의 누드가 보이지만 그레이스에겐 (공식적으로) 보이지 않는 그 순간. 그런 순간들을 위해 트리에는 이 영화를 만들었으리라.
조명의 극단적인 사용이 보이지만 대단히 특별하진 못하다. 물론 그 역설적인 사용은 주목할 만 하다. <만덜레이>에서 조명이 사용될 때 그 조명은 오히려 어둠을 강조하기 위함이고, <만덜레이>의 하늘이 어둠으로 뒤덮여 있을 때 그 어둠은 인물들에게 비치는 빛을 대비시키기 위한 사용이다.
아마도 본작은 '인종'이 가장 중요한 키워드일 것이다. 자유가 된 흑인 노예들이 어쩌면 '노예의 근성'을 버리지 못하는 이야기. 그러나 이 부분에선 트리에는 영리하게도 인종차별적인 논란을 살짝 빗겨 간다. 먼저 트리에는 그레이스를 비판한다. 영화의 시작부터 노예제의 잔존을 비판하는 그녀는 일견 노예들을 구원하는 구원자처럼 비춰지지만, 과연 노예들은 그녀를 진정 구원자로 받아들일까? 어떤 노예는 그녀를 두고 '당신 같은 사람', 즉 비참한 흑인 구제를 취미 삼는 귀부인이라 칭한다. 그레이스의 행동은 스스로의 선함을 증명하고자 하는 오만함에서 비롯된 강제적인 시혜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들은 노예로 평생을 살아왔기에 주인이 죽으니 자유인의 삶을 몰라 두려워한다. 그들을 옭아맨 '마님 룰'은 바로 그들과 같은 한 흑인이 적은 내용이었다. 규칙은 인간을 옭아맬 뿐인가, 그렇다면 규칙이 희미해진 곳에서 인간은 전진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만덜레이>는 '인간성'에 대한 탐구를 벌인다. 무법의 공간에서 인간의 욕망은 어떻게 싹을 틔우는가. 곳곳에서 꿈틀대는 사건들은 법이 사라진 곳이 얼마나 위태한 공간인지 말하고 있다. 또한 <만덜레이>는 인간의 한계를 말한다. 티모스의 본질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그레이스에서 인간은 결코 완전하게 이성적일 수 없음을. 또 그들의 결정을 존중하겠다 말한 그녀가 자신이 뱉은 말을 되돌릴 수 없을 때의 진퇴양난의 순간에서.
흥미롭지만 <만덜레이>는 전작이자 1부인 <도그빌>에 비해 못하고 트리에의 전체 필모그래피를 놓고 봐도 상위권에 랭크되기 어렵다. 전작 <도그빌>에 비해 힘을 상당 부분 뺀, 일종의 소동과 같은 에피소드식의 내용이라는 것이 물론 느껴지지만 그것을 차치하더라도 <도그빌>의 충격이 <만덜레이>에는 느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