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장면부터 연주를 감상하는 롱테이크가 등장한다. 주인공 부부는 고상한 문화인으로서의 자존심이 있으며, 음악가로서의 자아가 뚜렷한 인물들이다. 조르주에게 치매라는 사건이 닥쳤을지라도 그 또한 안느의 행동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치매가 발병한 인물은 안느다. 병증의 무서움보다 두려운 것은 자존심에 상처가 나는 것일 테다. 그렇기에 안느는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한다. 야뇨를 한 자신이 수치스러워 휠체어에 앉은 동시에 멀리 도망가버린다거나, 잘 움직이지도 않는 몸을 애써 일으켜 스스로 일어나려 발버둥친다.
롱테이크 기법을 저마다 다른 목적으로 활용하지만 하네케의 롱테이크는 '이 순간을 피할 수 없음'의 롱테이크이다. 그 흔한 클로즈업도 없이 고정된 숏으로 관조하듯 바라보는 카메라, 그럼에도 충격적인 순간을 보게 된다. 이건 감정의 문제다. 표현의 수위 문제가 아니다.
특별히 언급하고 싶은 일련의 숏들이 있다. 안느가 기어이 기저귀를 착용당하는 지경에 이르자 그녀는 수치스러운 감정을 감출 줄 모른다. 이어 안느가 가장 우아한 모습으로 비춰질 때인 피아노 연주를 하는 모습으로 숏이 전환되더니, 조르주가 이를 바라보는 숏이 이어지며 이는 조르주의 상상이었음이 드러난다. 안느의 상상인 듯 연결지으면서 조르주의 내면으로 다시 전환되는 흐름이 자연스러우면서도 미묘했다.
<아무르>의 러닝타임 내내 이야기의 공간이 되는 부부의 집은 짐짓 양가적인 느낌을 주게 된다. 집 안의 문들은 활짝 열려 있지만 집 밖의 문들은 굳게 닫혀 있어 마치 그들만을 위한 이질적인 '낙원'처럼 보이기도, '육체의 감옥'에 더해 안느 그녀를 움직일 수 없게 옥죄는 '공간으로서의 감옥'처럼 보이기도 한다. 죽은 시신을 마주하는 것보다 비참한 것은 죽어가는 시간을 경험하는 것이다. 안느가 죽어가는 과정은 오롯이 조르주만이 보고 느낄 수 있다. 죽음은 조르주에게도 가까이 가고 있다.
결말에 이르러 딸인 '에바'가 찾아왔을 때 모든 문은 열려있고 조르주마저 보이지 않는다. 때 늦지 않게 조르주에게도 찾아온 듯한 죽음은 그에게로 하여금 속세의 것들을 굳이 가지고 갈 이유가 없게 만든다. 육체의 은유로서 존재했던 이 공간은 더이상 필요치 않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