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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바이러스로부터 격리된 섬 홀리아일랜드로 돌아가지 않고 본토에 남기로 한 스파이크, 감염자와 공존하며 살아가는 켈슨 박사, 정체불명 인간 집단의 리더 지미가 얽히고 설키며 벌어지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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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각자의 위악성을 내뿜는 세계에서 기어이 가려지는 진실과 거짓
이 작품 자체에 대한 완성도와는 조금 다른 시선에서, 이제까지 있었던 트릴로지의 두 번째 작품들 중 세계관에 대한 ‘기능적인 역할 수행’을 따진다면 본작은 아마 상위권에 랭크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작품이다. 전작을 보고 온 자들은 이제 이 트릴로지가 오리지널 격의 전작들과는 완전히 다른 노선을 향하고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이 프랜차이즈는 더는 호쾌한 장르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장르적 장치를 이용해 어떤 신화적·종교적 이야기를 변주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인상이 강하다.
영화는 전작의 엔딩 직후에서 시작된다. 어두운 곳, 스파이크는 지미 일당 중 한 명과 거친 싸움을 벌이고 끝내 승리한다. 그리고 그는 ‘지미’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는다. 말하자면 그들 집단의 새로운 ‘지미’가 되는 것이다. 명백히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새로 받았던 야곱의 일화를 차용한 오프닝이다. 이 장면은 영화가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할 것인지 미리 선언하는 장면처럼 보인다.
<28년 후: 뼈의 사원>은 성경적 모티프가 가득하다. 흥미로운 것은 그 차용의 방식이 대체로 비틀린 형태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마치 작중 지미라는 캐릭터가 지닌 어떤 감정의 잔재처럼 말이다. 목사였던 아버지가 좀비 사태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을 목격했던 그는, 이후 기독교에 대해 일종의 혐오와 뒤틀린 집착을 동시에 품게 된 인물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의 성경적 모티프들은 대부분 원래의 의미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다시 쓰인다.
영화 속 대지는 에덴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그 맥락은 완전히 반대다. 에덴이 세상의 시작과 탄생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면, 이곳은 모든 것이 끝난 뒤 남겨진 폐허다. 시작이 아닌 이후, 탄생이 아닌 사멸의 공간. 에덴이 창세의 신화라면 이곳은 멸망 이후의 신화처럼 기능한다. 이 사멸의 공간에서 변수처럼 기능하는 어쩌면 유일한 인물은 전작에 이어 등장하는 켈슨이다. 영화가 그를 통해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단 하나다. 그는 사태 이전의 세계를 ‘기억’한다. 켈슨은 자신의 거처에서 음악 플레이어로 음악을 들으며, 가족과 함께 찍었던 과거의 사진을 바라본다. 그는 이 세계에서 공식적으로 유일하게 사태 이전을 기억하는 인물이다. 이 설정은 본작이 제시하는 새로운 시선과도 맞닿아 있다. <28년 후: 뼈의 사원>은 좀비물의 관습을 조금 다른 방향으로 비튼다. 대부분의 좀비 영화에서 좀비는 ‘돌이킬 수 없는’ 존재다. 이미 인간에서 좀비가 되었고, 그 폭주를 멈출 방법은 결국 그 존재를 죽이는 것뿐이다. 그러나 본작은 조금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다. 만약 좀비가 인간이었을 때의 ‘기억’을 되찾는다면 어떨까. 좀비에서 다시 인간으로 되돌아가는 길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켈슨은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모르핀 중독으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고, 그래서인지 이 사멸의 세계와 닮아 있는 인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삼손을 마주한 뒤 그는 다른 선택을 한다. 처음에는 그를 죽여주려 했지만, 삼손에게서 어떤 희망을 발견한 뒤 결국 그를 회복시키기로 결심한다. 그 점에서 본작은 삼손의 성장 이야기이기도 하다. 인간의 경추를 뽑아 죽이는 무시무시한 알파이지만, 이상하게도 켈슨에게는 두려움을 느낀다. 이미 되돌릴 수 없을 것 같던 존재였던 그를 살릴 방도는 결국 ‘기억’이었다. 어쩌면 더 정확히 말하면 ‘무의식’이었을 것이다. 사실상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기억을 가지고 있던 인물인 켈슨의 도움을 통해, 삼손은 의식이 존재하던 과거의 마지막 순간을 무의식 속에서 끄집어낸다. 그렇게 삼손은 이 이야기에서 일종의 재생, 혹은 탄생의 모티프로 기능하게 된다.
한편 감독 니아 다코스타는 지미라는 인물의 캐릭터를 성경 속 예수를 연상케 하는 방식으로 구축해 놓는다. 지미가 실제로 예수를 벤치마킹했던 것일까. 그의 행적은 분명 예수를 떠올리게 한다.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이끌고 다니며, 끊임없이 자신보다 더 높은 존재인 ‘아버지’를 언급한다. 하지만 그 모습은 어디까지나 예수를 흉내 내는 적그리스도에 가깝다.
니아 다코스타는 마치 예수를 자칭하는 지미에게 성경의 이름으로 심판을 내리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을 아버지의 아들이라 부르는 지미에게 켈슨이 던지는 말이 그 대표적인 예다. “예수는 십자가에 먼저 못 박혀야 했으니 그와 똑같은 희생을 원한다.”라는 그의 대사는 어쩐지 지미 개인에게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역사 속에 산재했던 모든 ‘자칭 예수들’을 향한 선언처럼 들린다.
지미는 결국 십자가에 매달린 채 죽음을 맞이한다. 그는 예수의 가상칠언 중 하나인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을 그대로 내뱉는다. 하지만 그 장면 역시 원래의 맥락과는 정반대로 뒤집혀 있다. 지미는 예수와 달리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는다. 예수의 죽음이 비극적 희생이었다면, 지미의 죽음은 근본적으로 빌런의 퇴치에 가깝다. 전작과 본작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던 인물의 퇴장이기에 일종의 페이소스가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야기의 차원에서 보면 그것은 ‘정의의 구현’에 가까운 사건이다.
그리고 영화는 한 쌍의 남녀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자신의 이름, 그러니까 자신의 본명을 스스로 다시 정의하고, 스스로 자신이 속해 있던 구역을 떠나는 두 사람.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지만, 역시 그 맥락은 미묘하게 비틀려 있다. 에덴에서 추방된 인간의 이야기라기보다, 폐허가 된 세계에서 스스로 새로운 시작을 선택하는 인간의 이야기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신화가 끝난 뒤에도 인간의 이야기는 계속된다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영화의 에필로그에 더해진 이 세계관의 오리지널 주인공과 함께, 3편이 기다려지는 이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