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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성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순례를 떠난 두 주인공이 길 위에서 기독교의 여러 교파와 윤리를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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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의 껍질을 벗겨 진실한 신성을 목격하려 한 예술가의 사투
마치 프롤로그와 같은 영화의 오프닝은 내레이터가 산티아고 순례길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고대를 한가득 담은 듯한 건물들의 이미지가 연이어 등장하지만, 그것들의 끝에는 돌연 현대의 공간이라 불러야 할 국도의 풍경, 달리는 자동차들이 끼어든다. 중세와 현대의 거친 접합. 그것은 내내 이 영화를 관통하는 미학적 태도다. 영화의 두 주인공 뒤퐁과 뒤발은 분명 현대에 속한 인물이지만, 그들의 여정에서는 문명의 감각이 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동굴 입구에서 비를 피하는 장면은 고대를 그린 회화를 떠올리게 하지만, 직후 열차에서 내리는 장면과의 접합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시대를 도약한 듯한 인상을 남긴다. 이 어색한 점프는 이 영화가 시간을 다루는 방식, 나아가 신과 인간을 바라보는 태도를 예고하는 듯하다.
뒤퐁과 뒤발의 여정은 순례라기보다는 식도락 여행에 가깝다. 그들은 길 위에 있지만 금욕이나 헌신보다는 배고픔과 피로, 투덜거림이 먼저다. 번민과 의심으로 채워진 여정 끝에서 그들이 산티아고에 도착해 마주하는 것은 어떤 구원이나 계시가 아니라, 마치 예언이 이행되듯 등장하는 ‘마릴린 먼로를 닮은, 당신들의 아이를 낳겠다는 여성’이다. 이 결말은 순례의 서사를 완성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비껴간다. 구원을 향해 나아간다는 형식만 남은 여정, 그 형식에 무심히 몸을 실은 두 인물은 결국 이 영화에서 완전히 무죄하지도, 완전히 조롱의 대상만도 아니다.
뒤퐁의 과거를 회상하는 플래시백에서는 마리아와 예수처럼 보이는 인물들이 ‘뒤퐁의 어머니’와 ‘뒤퐁’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등장한다. 그들이 길에서 만나는 아이는 양손과 이마에 핏자국이 있는 아이인 동시에, 히치하이킹으로 도움을 주는 현실적인 존재다. 여기서 부뉴엘은 신성의 이미지를 높은 곳에서 끌어내려 우리와 같은 높이에 놓는다. 경외의 대상이 아니라, 같은 길을 걷는 존재로서의 신. 신성과 일상의 구분은 이 순간 흐릿해진다.
이 여정의 초입에서 뒤퐁과 뒤발이 마주하는 검은 옷의 남자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언어의 성격을 응축한 인물이다. 그는 미스터리한 말을 남기고 사라지는데, 그 말들은 예언이라기보다는 인용에 가깝다. “돈이 없으면 끝까지 없을 것이고, 있으면 훨씬 더 많이 갖게 될 것이다.”라는 문장은 신약의 구절들을 연상시키고, 아이들에게 붙여진 이름인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 “더 이상 자비는 없다”는 호세아서의 문장이다. 부뉴엘은 이 문장들을 설명하지도, 은총이나 믿음이라는 완충재로 덮지도 않는다. 그 결과 성경의 언어는 비유가 아니라 분배의 법칙, 소속의 박탈, 자비의 중단이라는 냉혹한 공식처럼 들린다.
중요한 것은 이 말을 하는 존재가 신인지 악마인지 끝내 규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판단하지 않고, 책임지지 않으며, 그저 말한다. 마치 교리 그 자체처럼, 혹은 이 영화 안에서 거스를 수 없는 규칙처럼. 그래서 이 장면들은 신성모독의 농담이 아니라, 신학적 언어가 이미 얼마나 잔혹한 논리를 품고 있었는지를 드러내는 증거처럼 보인다. 부뉴엘은 신을 공격하기보다 ‘신의 이름’으로 유통되어온 문장들을 그대로 노출시키며 묻는다. 만약 세계가 이런 말들로 조직되어왔다면, 문제는 신의 부재가 아니라 그 언어를 너무 오래, 너무 순순히 받아들여온 인간 쪽에 있지 않은가 하고.
이 질문은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종교적 논쟁들로 확장된다. <은하수>에 등장하는 논객들은 예외 없이 부뉴엘의 조롱과 풍자의 대상이다. 주인공들이 처음 도착한 식당에서는 동네 반장과 신부가 논쟁을 벌인다. 반장은 기적을 자연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기에 예수를 믿는다. 신부 역시 예수를 믿지만, 그는 성경이 과학과 맞아떨어진다고 말한다. 빵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장의 질문에 신부는 화체설로 답하지만, 곧 정반대로 “그렇게 느껴진다”고 말하며 감각의 언어로 도망친다. 그리고는 돌연 커피를 반장의 얼굴에 붓는 기행을 벌인다. 이어 들이닥친 병원 직원들에 의해 그는 정신병원을 탈출한 전직 신부였음이 드러난다. 이 장면은 믿음이 이성으로도, 감각으로도 끝내 봉합되지 못하는 모습을 희극처럼 보여준다.
기독교의 분파들은 더 극단적인 형태로 등장한다. 산기슭에서 ‘신성한 의식’을 치른 집단은 의식이 끝나자 집단 난교로 향하고, 근엄해 보였던 주교는 여성 둘을 끼고 유유히 사라진다. 반대로 고통을 통해 신에 다가가려는 이들도 있다.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히길 요청하는 수녀, 그리고 그 장면이 벌어지는 엄격히 닫힌 얀센주의자들의 공간. 이후 다시 등장한 전직 신부는 예수회의 관념을 들고 백작과 설전을 벌이고, 그 논쟁은 결투로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결투는 언제 있었냐는 듯 어깨동무로 끝난다. 실제 역사처럼, 교리의 대립은 치열했지만 권위의 언어를 사용하는 자들이라는 공통점 속에서 그들은 쉽게 하나가 된다. 남는 것은 공허한 연극뿐이다.
이 모든 풍경 속에서 부뉴엘의 시선은 신 자체보다는 인간에게 향해 있다. 반장의 하인이 던진 질문을 계기로 등장하는 예수는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온 근엄한 형상과 다르다. 그는 웃고, 기침하며, 느릿느릿하지 않은 현대적인 속도로 말한다. 가나의 혼인 잔치까지 이어지는 이 예수 시퀀스는 신성함을 제거한 대신 이상할 정도의 생동감을 얻는다. 나에게 부뉴엘은 무신론자라기보다는, 신의 이름으로 구축된 교조와 권위를 혐오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그는 신성을 전면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대부분 권위로 시작된 ‘근엄한 신성함’을 거부한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서 치장을 벗은 기적들은 오히려 더 신비스럽고 진정성 있게 다가온다.
영화의 엔딩에서 다시 등장하는 예수와 맹인들의 장면은 이 태도를 명확히 드러낸다. 예수는 분명 맹인을 고친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여전히 지팡이로 앞을 더듬는다. 한 명은 장애물을 넘지만, 다른 한 명은 끝내 넘지 못한다. 기적이 있었는지를 두고 부뉴엘은 판단을 유보한다. 그가 관심을 두는 것은 오히려 이 지점이다. 설령 신이 기적을 행했더라도, 인간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사실. 눈앞에서 벌어진 사건조차 이렇게 해석이 갈리는데, 2000년 동안 이어져 오며 수없이 분화된 교리 해석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부뉴엘이 신을 대하는 태도에는 조롱만이 아니라 애정 또한 함께 있다. 그것은 믿음을 부수기 위한 조롱이 아니라, 너무 오래 굳어버린 언어와 형식에 대한 피로에 가깝다. <은하수>는 신을 부정하는 영화라기보다, 신의 이름으로 말해져 온 것들을 끝까지 의심해보려는 영화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의심의 끝에서 남는 것은, 신보다도 인간 자신에 대한 질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