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은 우선 인간 전두광을 대중들에게 무참히 각인시킨다. 전두광의 첫 등장은 그의 뒷모습이고, 두 번째 등장은 김재규의 시점 숏에서의 앞모습으로, 세 번째 등장은 '옆모습'으로 등장한다. 이제 관객은 전두광이라는 인물의 얼굴을 완벽히 파악한 셈이다. 기자들의 앞에서 브리핑을 하는 순간 전두광은 이미 대통령이었던 셈이다. 또한 이야기의 초반, 영화는 전두광의 시선을 따라 시공간을 바라본다. 다른 주인공인 이태신과의 첫 대면에서, 상대방을 '먼저' 바라본 이는 전두광이었다. 집단을 이루는 자신에 반해 독고다이 혈혈단신으로 행동하는 이태신. 그야말로 활화산같은 인물들. 열정은 있지만 계급이 밀려 울분을 참는 전두광. <서울의 봄>의 전두광은 이미 야망이 시작된 인물이자 한편으론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인물이다.
원체 사건의 성격 자체가 극적이고, 촌각을 다투며 판세가 바뀌었던 사건인지라 어지간하게만 만들어도 긴장감은 극에 가득했을 것이다. 그러한 이점을 파악하고 있는 동시에, <서울의 봄>은 연출에 있어서도 나이브하게 일관하지 않는다. 과감한 화면 분할로 숏의 급박함을 더하고, 정의 공간과 동의 공간을 교차해 사건을 보다 풍성하게 만들어낸다. 그리고 무엇보다, 역사는 때론 작은 변수에 의해, 영원히 바뀐다는 것을 역설한다.
<서울의 봄>은 사건을 고발하는 영화인가 악인을 고발하는 영화인가. <서울의 봄>은 (상당히 과하다시피) 인트로에서부터 '그날의 진실'을 밝히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그러므로 이 프로젝트는 태생부터 사건이 중요했을 것이다. <서울의 봄>은 물론 결말까지 그러한 태도를 잃지 않았지만 영화가 관객을 채 설득하기도 전에 스스로 감정적이 되어버리는 순간들이, 영화가 특정하는 어떤 인물들에 있어서 느껴진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정녕 '인물'의 영화였다면 문제가 되는 부분이 아니었겠지만, 이 영화는 태생적으로나 명분으로나 '사건'의 영화였기에.
압도적으로, 정우성의 경력 최고 연기다. 자주 말한 내 의견이지만, 영화라는 매체에서 '연기력'은 미묘한 지점이다. 한 작품에서 배우의 연기가 호평을 받는 경우, 실제로 그 배우가 과거보다 연기적인 '스킬'이 발전한 까닭에서일 수도 있고 혹은 감독이 그 배우의 장점만을 카메라 안에 탁월하게 담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정우성 배우와 여러 차례 작업을 한 김성수 감독은 그가 어떤 역할을 맡으며 카메라에 어떻게 담겨야 가장 '멋'이 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감독이다. 이태신은 '정의의 사도'이며, 융통성은 없을지라도 굳건하다. 야비하고 권모술수를 부리는 캐릭터는 정우성에게 최적의 옷이 아니다. 전형적인 장면이지만 마음을 울리는, 이태신의 출정 전 마지막 모습을 계백 장군을 연상케 하는 비장함이 있다. (성시경의 '먹을텐데'였던 거 같다. 정우성 배우가 출연한 영상을 봤었다. 정우성 배우 역시 자신이 어떤 역할에 가장 잘 어울리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자신이 잘 하는 것과 자신이 하고 싶은 것에서 배우는 고민이 많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