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두 가지 비전이 얽혀 있는 형태이다. 기독교적 관념을 뒤집은 상징과 여성 해방의 서사. 또한 타르코프스키의 <잠입자>를 뒤집은 표현들이 가득하다.
사슴이라는 심볼은 성서적 관점에서 신앙과 생명을 대표하는 아이콘이다. 이를 뒤집어 <안티크라이스트>에서는 생명을 탄생시키지 못하는 이미지로서 기능한다. 창세기에서의 에덴은 만물이 생성되고 생명이 약동하는 공간이다. <안티크라이스트>에서의 에덴은 생명이 숨쉬지 못하는 추락의 공간이다. 영화는 제목부터 유럽 문명의 근간을 이루는 기독교적 관념을 무한히 뒤집는 담력을 보여준다.
<안티크라이스트>의 이미지는 타르코프스키의 <잠입자>에서 여럿 차용되었다. 전자에서 물이 쏟아지는 병은 후자의 엔딩과 조응하는 이미지이며, 전자에서 주인공이 창문 바깥의 유리컵에 물이 차는 순간을 바라보는 이미지는 명백히 잠입자의 그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무대가 되는 '에덴'은 습습한 이미지와 초현실적 공간감에서 잠입자의 형상을 연상케 한다.
또한 <안티크라이스트>는 <잠입자>의 여러 구조를 뒤집어 사용하기도 한다. 타르코프스키의 <잠입자>는 어린 아이를 구원의 희망으로 비추며 영화를 끝마친다. 트리에는 <안티크라이스트>의 오프닝에서부터 어린 아이를 창밖으로 내던진다. 전자에서 희망과 생명을 어린 아이라는 심볼로 대표했다면, 후자에서의 어린 아이의 추락은 생명의 탄생인 성관계와 병치되는 프롤로그를 통해 명백히 죽음과 절망의 이미지로 환기된다.
<안티크라이스트>에서 나무토막을 가지고 노는 어린 아이의 모습을 통해, 윌럼 데포가 분한 '그'를 예수의 아버지인 목수 요셉과 연결짓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잠입자>에서의 마지막 어린 아이를 재림예수로 바라보는 관점이 많은 지지를 받기에, 이를 뒤집은 <안티크라이스트>에서의 어린 아이가 상징하는 바는 이와 개념은 같되 관념은 뒤집은 결과물일 것이다.
한편으론 인류의 시작인 아담과 이브가 연상되기도 하는 <안티크라이스트>의 두 남녀는 세상의 시작인 동시에 죽음의 에너지가 흐르는 '에덴'이라는 공간으로 향하며 <잠입자>의 지식인들은 운석이 떨어진 세상의 끝인 동시에 구원을 소망하는 공간으로 향한다. 이렇듯 두 영화의 구조적인 대비는 흥미롭다.
두 공간이 인물에게 미치는 영향력 또한 주목할 만한데, <잠입자>에서의 '구역'은 인물이 진정 원하는 것을 상기시키고 확인시키는 내적 성찰의 공간으로 기능한다. 이를 뒤집어 <안티크라이스트>에서의 '에덴'은 인물(영화에선 '그녀')의 폭발적인 본성을 발견하고 확인하며 발현시키게끔 하는 외적 발화의 공간으로 기능한다.
에덴이 '그녀'의 본성을 일깨우는 공간으로 기능하기에, 이 영화는 트리에의 다른 영화처럼 여성 수난사, 내지는 여성 해방 서사를 가진 영화라고 나에겐 보인다. 지식인으로 설정되는 남성은 그의 영화에서 항상 상대방과의 권력 관계를 수직적으로 설정하며 상대방을 지배하려 행동한다.
죽음을 통한 역설적인 구원처럼 느껴지는 그의 여타 영화와 비슷하게 이 영화의 후반부는 그녀의 해방 또한 얼굴없는 수많은 여성들의 해방, 이를 위한 에덴으로의 여정처럼 나에겐 다가온다. 트리에는 세계에서 가장 여성 서사를 잘 만드는 감독처럼 생각된다, 그 지독한 방법론으로 인해 이에 쉬이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겠다만.
나는 이 영화가 걸작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추천해주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