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verture라는 '서막'이 들린다. 그야말로 클래식한 영화의 시작. 클래식한 영화에 애드리언 브로디보다 나은 배우가 있을까? 주제적으로나 시기적으로나 <피아니스트>의 후속작같은 느낌을 전한다. 편지의 방법으로 주인공과 그의 아내를 간신히 잇지만, 어디인지 모를 어둠을 헤매고 있는 주인공. 그 곳이 배 안이라는 것이 파악되고 이내 어둠이 걷히며 밖으로 나오게 된 주인공을 반겨주는 것은 화창한 빛과 '자유의 여신상'이다. 그러나 마치 어린아이를 유인하려고 어른이 손에 대롱대롱 매단 장난감 인형의 모습처럼, 프레임 상단에 간신히 걸려 있는 자유의 여신상은 아메리카 대륙을 상징한다는 그 의미에 역설적이게도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고) 바다를 건너 온 주인공의 앞날이 평탄하지만은 아닐 것임을 암시한다.
<브루탈리스트>는 아메리카 대륙에 넘어온 이방인의 시선에서 현대 미국의 가족 신화를 관찰한다. 전쟁을 (직접) 겪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전쟁 한가운데 있던 이방인. 자수성가해서 크나큰 경제적 부를 얻은 세대. 그리곤 그 세대와 다른 그 아래 세대. 부자 간의 갈등. 경제적으론 빠르게 성공했으나 그에 비해 따라오지 못한 다른 부분들에 결핍을 느끼고 라즐로를 찾는 밴 뷰런은 마치 (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은) 미국의 역사를 보는 듯 하다. 그 결핍이 뒤틀리며 팽창하여 벌이는 흉악한 언행들. 그리고 아버지와는 다르고 싶은 아들. <브루탈리스트>는 미국의 가족 신화를 해체한다.
에필로그로 분리된 영화의 엔딩은 상반되는 두 정서를 아이러니컬하게 제시한다. 제 1회 건축 비엔날레에서 라즐로는 뜨거운 박수를 받는다. 지금까지의 작품들을 소개해주는 공간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것은 단연 '마가렛 리 밴 뷰런 센터'다. 조카 조피아의 해설을 통해 설명되는 라즐로의 터치는 군중들에게 감동을 안겨준다. 유대인으로서 자신이 경험했던 수용소에서의 과거를 작품에 반영해 자신들의 역사를 후대에 영원히 기억되게 하였다. 인간은 필멸하지만 예술로서 불멸의 역사를 빚어낸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을 뒤집어 보자면 예술은 멸하지 않는다 할지언정 그 예술의 주인공은 너무나 초라한 모습으로 사멸해 가고 있다. 스스로의 역사를 건물의 구조에 담아 건설했지만 그 예술가의 역사는 그를 성폭행한 '주인'의 이름으로 불리며 회자된다. 후대의 사람들은 '마가렛 리 밴 뷰렌 센터'를 보며 라즐로를 기억할까? 아니면 밴 뷰런을 기억할까?
"결과가 과정보다 중요하다"는 말 역시 젊은 날의 그가 한 것이지, 백발에 제 몸 하나 거동하지 못하는 현재의 라즐로가 한 말은 아니었다. 1980년의 현재에서 그 말을 전하는 이도 노년의 라즐로가 아닌, (아마도 시오니스트일) 그의 조카의 입을 통해서이다. 라즐로가 있었던 강제수용소를 센터에 재현한 것이라는 입장 또한 라즐로의 입이 아닌 조카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현재에 들어선 그의 작품이 시오니스트들에 의해 특정한 목적을 위해 악용되진 않을까? 극중 라즐로는 한 번도 자신의 입을 통해 그러한 말을 내뱉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 말조차 뱉기 어려워하는 그의 눈에서, 그에게 헌사를 바치는 조카의 말을 들으며 어떤 감동과 위로의 감정도 읽을 수 없었음은 나뿐인가. 모든 예술가가 현재의 삶이 망가져도 미래에 이름을 남긴단 이유로 행복하다 말할까? 몰입을 넘어선 집착으로 인해 자신의 아내가 아파하는 순간에조차 대처하지 못한 채 기어이 스스로가 몰래 사용하던 마약을 투여해줄 수밖에 없었던 처참함을 맛봤던 사람이 죽을 날이 가까워진 지금 스스로의 그 완성품이 후대에 남으리라 찬미해 주는 말들이 정녕 귀에 들릴 것인가? 둘 중 어느 것만이 옳다 판단하긴 어렵다. 감독은 정답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후자의 편이 마음이 간다. <브루탈리스트>는 해피엔딩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