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 경력을 쌓아온 거장들의 필모그래피에는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고도 관통하는 듯한 지점이 담겨 있는 작품들이 있다.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이라던지, 오즈 야스지로의 <꽁치의 맛>이라던지, 마틴 스콜세지의 <아이리시맨>이라던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 토리노>라던지. 특이하게도 스필버그는 황혼의 경력에 이르렀음에도 위와 같은 작품들을 만들지 않았었다. 사실 그의 작품들은 최근까지도 여전히 현장에서 뛰는 듯한 생생함이 있었기에 위와 같은 작품들을 덜썩 그가 내놓는다면 무언가 아쉬움이 감돌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허나 그러한 못난 우려가 무색할 만큼 스필버그는 자신의 인생을 관통하는 <파벨만스>라는 걸작을 들고 나왔다.
<파벨만스>는 영화의 위대함을 칭송하는 영화가 아니다. 영화는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는 우연성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새미는 아프게 깨달으며 성장해나간다. 현실에선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고 벌어진 일을 바꿀 수도 없다. 허나 동시에, 영화 안에선 (정확힌 카메라 안에선) 권력을 쥔 채 세계를 통제하고 실제를 바꿀 수 있다. 실제와는 너무나 다른 스크린 속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워하는 로건의 모습이 그렇다. 이건 어떠한 가치판단의 문제가 아니다. 영화 제작의 권력을 흠모하는 것도 아니며, 차라리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굴레의 문제처럼 느껴진다. 가치적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사실적 판단일 뿐이라는 비극적 진실.
또한 사촌 보리스는 예술가는 필연적으로 이기적이 될 수밖에 없다 말한다. 베니가 그리워 피닉스로 돌아가고 싶다는 미츠, 이로 인해 발발한 가족 간의 어떤 내전. 이 순간마저 카메라를 들고 촬영을 하는 자신의 환영을 마주했을 때 새미는 깨닫게 된다. 섬뜩할 정도로 기회주의적인 자신의 단면을 목도했으니. <파벨만스>는 희극이 아니라 진실과 대면하는 영화다.
감정적으로 사랑스럽고, 기능적/기술적으론 위대하다. 무엇보다, 존 포드와의 그 유명한 일화를 마지막에 배치하여, 이 영화의 마지막을 목격하며 지평선 위치의 흥미로움을 깨달을 '미래의 스필버그'들에게 주는 선물로서의 엔딩은 감격스러울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