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그빌'이란 이름을 가진 마을의 주민들을 "그들은 선량하고 마을을 사랑했다"라고 소개하는 내레이터의 목소리를 오프닝으로 듣는 것에서 미심쩍인 마음을 품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한 역설적이게도 <도그빌>의 조명은 그 조명이 비추지 않는 어둠의 공간들을 만들기 위해 세팅된 것만 같다. 엔딩에 이르러 달빛이 마을을 비추고 나서야 드디어 주민들의 모습이 분명하게 모두 보인다. <도그빌>은 이렇듯 역설에 대한 이야기다. <도그빌>은 사회심리학적 실험실을 통해 인간의 밑낯을 파헤친다. 회의적이고 마을에서 유일하게 이성적인 사람인 것처럼 보이던 인물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스스로의 검은 속내를 드러내고, 누구보다 앞서서 낯선 이를 보호하는 것 같던 인물은 가장 중요한 순간에서는 용기를 내지 못한 채 침묵한다.
또한 본작에는 무엇보다 강력한 규칙이 작동하는데, <도그빌>을 읽는다는 것은 영화 <도그빌>의 규칙을 받아들인다는 것에 있다. 배우들은 벽이 안 보이고 눈앞의 배우가 보이겠지만, 영화의 규칙은 벽이 있고 눈앞의 배우가 보이지 않는 것이기에 배우들은 눈앞에 벽이 있고 상대방이 보이지 않는다 생각하며 연기해야 한다. 그러한 부분에서 영화에 킥이 되는 한 순간을 꼽으라면 단연 척이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순간일 것이다. 이 영화의 형식은 어쩌면 이 순간 그 쇼트를 위해 존재했던 것이다. 눈 앞에 보이지만 주민들에겐 보이지 않는 그곳. 아니 어쩌면 보이지만 외면하기에 보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밖에선 오두막 안의 울부짖음이 들리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들리지만 듣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현장의 '배우'들은 당연히 장면이 보이고 소리가 들리지만 영화의 '인물'들은 장면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으며 소리가 들리지 않을 수도 있다. 형식은 주제의 은유다.
주민들은 스스로 친절한 공동체라 자칭하지만 톰이 보기엔 그렇지 못하다. 성경에서 도마는 예외적인 인물이었다. 성경을 거꾸로 쓴 <도그빌>은 도마의 행적을 거꾸로 쓴다. 말하자면 -에서 출발해 +로 결말을 맺은 성경 속 도마와는 정반대로 <도그빌>의 톰은 +로 시작해 -로 끝나는 인물이다. 성경 속 도마는 더딘 사람이었지만 그렇기에 가장 완전한 설득력을 지니는 고백을 보여주었다. <도그빌>의 톰은 그 반대다. 그 역시 도마처럼 느렸지만 그는 끝끝내 행동하지 못했다. 그레이스의 수난을 바라보며 고통스러워 하기만 했으며, 마을의 주민 중 유일하게 그레이스를 향한 욕망을 억누른 인물이지만 그녀를 밀고할 욕망을 억누르지는 못한다.
그레이스의 아버지는 그레이스를 비판한다. 그레이스는 사람들을 너무 쉽게 용서한다고 한다. 모두를 포용하는, 모두를 포용하려는 그레이스의 사랑은 그녀의 오만함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저 사람들은 어쩔 수 없는 자들이기에 저들보다 고고한 내가 그들의 죄를 대속하겠다는 그레이스의 생각은 그녀 역시 같은 인간이기에 그저 오만함으로 비춰질 뿐이다. 동정에서 비롯되는 이해와 사랑은 매번 지속될 수는 없다. 어느 순간에는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엔딩의 학살은 카타르시스의 그것과는 분명 거리가 있다. 그건 카타르시스보다 통과의례의 의미였으니까.
2024.7.12 CGV오리 2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