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이러한 비주얼을 가진 영화가 현 시대의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극장에 제한적으로 걸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는 것이었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독보적인 미학이 스크린 위에서 마음껏 펼쳐지기에는 환경이 너무 각박하다는 사실이 새삼 크게 다가왔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작품 세계는 이번 영화에서 특히나 잘 맞아떨어진다. 감독 스스로도 가장 좋아한 문학 작품이라 밝혔듯이, 기괴함과 아름다움이 충돌하면서도 공존하는 그의 개성이 고전에 오른 텍스트 위에서 유난히 빛난다. 과잉의 비주얼을 활용하는 두 명의 감독을 꼽아보라면 요르고스 란티모스와 기예르모 델 토로가 떠오르는데, 근래 란티모스의 과잉이 다소 위악적으로 느껴진 것과 달리 델 토로의 과잉은 여전히 그의 아름다움을 피워 올리는 거름처럼 기능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개인적으로는 이번 작품을 보며 델 토로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예전에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판의 미로>를 조만간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도 문득 스쳤다.
이야기 속 빅터는 죽음을 극복하겠다는 집착을 온몸으로 밀어붙인다. “죽음을 정복할 수 없다”던 아버지 앞에서, 그리고 생명을 주관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라며 경고하는 교수들 앞에서, 그는 신이 미숙했었다고 말하며 자신만만하게 선언한다. 신의 실수를 바로잡고 생명을 주관하겠다는 집념은 결국 그를 신의 자리에 오르게 하지만, 막상 그 자리에 도달하고 나자 그는 아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창조 이후의 삶은 그의 계산 밖의 영역이었다.
괴물이 탄생하는 밤의 시퀀스는 영화 전체에서 가장 강렬한 순간이다. 그야말로 파토스가 폭발한다. 세월이 지나도 <프랑켄슈타인>이 원작 『프랑켄슈타인』을 넘어서지는 못할 것이다. 오리지널이라는 태생적 차이는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이 탄생의 시퀀스만큼은 원작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있다.
빅터와 괴물의 관계는 분명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다. 그러나 영화는 은근히 아버지-자식 구도를 겹쳐 놓는다. 이 둘은 서로 다른 개념이지만, 작품은 그 사이 어딘가에서 두 관계를 미묘하게 오버랩시킨다. 그래서인지 괴물에게 이입된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게 다가온다.
기예르모 델 토로는 소수자를 향한 따스한 시선으로 유명한 감독이다. 그는 이번에도 원작을 그대로 옮기는 대신 그 시선을 유지한 채 엔딩을 다른 방향으로 각색한다. 원작에서 괴물은 비극을 향해 끝없이 추락하며 배드 엔딩을 맞지만, 영화 속 괴물은 창조주이자 동시에 아버지의 위치에 있는 빅터를 용서하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여지를 남긴다. 이 변화는 델 토로식 해석이자, 괴물을 향한 따뜻한 재조명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