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치의 정수는 말하자면 '냉정함'에 있다고 여전히 생각한다. 그가 최고의 모습을 보였을 때는 악몽과도 같은 공포의 정서를 영화 안에 녹여냈을 때였다. 그러나 린치의 2번째 장편 영화인 <엘리펀트 맨>은 그러한 린치의 이미지와는 대척점에 놓여있는 작품이라 말할 수 있을 만큼 색다른 정서의 결과물이다.
고딕적이라 말할 수 있을까. 직선의 정돈된 비주얼이 우선 눈길을 사로잡는다. '린치스러움'이 자유형 혹은 곡선이라면, 적어도 프레임 속을 책임지는 비주얼은 린치의 다른 작품들과는 사뭇 다르다. 영국 산업 시대의 근대적인 분위기가 은혜로울 정도다.
'엘리펀트 맨'이라 불리는 존 메릭을 대하는 다양한 반응은 군상극 같다. 악의는 없지만서도 그를 무서워해 도망가는 불쌍한 간호사를 조명하기도 하며, 호의와 호기심이 합쳐진 박사 트리브스를 그의 곁에 두기도 한다. 보고 있는 관객을 학대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메릭을 괴롭히는 집단의 지독함을 가감 없이 보여주기도 하며,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을 사회적 권력을 가졌지만 그의 순수함을 사랑해주는 배우 켄들을 등장시키기도 하고, 그를 그저 돈벌이 수단으로 보는 서커스단 주인 바이츠까지. <엘리펀트 맨>은 하나의 사회극 같기도 하다. 나와 다른, 우리와 다른 사람을 마주했을 때,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하는가.
주변인들의 액션에 대해 '리액션'을 하는 역할로서의 존 메릭이 적극적으로 '액션'을 하는 장면이 두 순간이라 볼 수 있겠다. 박사에게 배우지 않았던 시편 23편의 뒷부분을 소리 내어 암송하는 씬과, 자신은 코끼리가 아니라 사람이라며 자신을 쫓아온 사람들 앞에 소리치는 장면이다. 전자는 아마도 영화에서 가장 높고도 성스러운 순간일 것이고, (화장실 구석에서 군중들에게 이야기하는) 후자는 아마도 가장 처절하고도 구슬픈 순간일 것이다.
예술의 시작은 '다르게 보기'이며, 편견 그 너머를 보는 것이다. 예술이 만약 인간이라면 그는 아마 세상에서 가장 편견이 없는 자일 테다. 어찌 보면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열려 있는 것이 예술 아닌가. 예술의 궁극의 지향점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존 메릭에게 박수를 쳐주는 관객들의 장면에서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존 허트의 투혼에 가까운 연기다. 안소니 홉킨스의 연기가 가려질 만큼.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메릭은 베개를 머리맡에 쌓아두어야지만 자면서도 숨을 쉴 수 있었다. 한 번이라도 남들처럼 '평범하게' 자고 싶었던 메릭. 그러나 그런 행동은 곧 이승에서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생 소원이었던 공연 관람을 마친 이후, 생의 여한이 없는 듯 주저하지 않는 메릭은 그렇게 그리운 어머니를 만난다. 엔딩이 이리도 아이러니하면서 절묘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