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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에서 택시를 모는 구남은 빚더미에 쌓여 구질구질한 일상을 살아간다. 한국으로 돈 벌러 간 아내는 6개월째 소식이 없고, 돈을 불리기 위해 마작판에 드나들지만 항상 잃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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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우는 고래싸움에 등이 터질지라도 목숨만은 부지하길 바란다
트럭이 사람을 들이받을 때, 차와 차가 서로 거칠게 충돌할 때, 그 타격은 화면 밖까지 육중하게 밀려온다. 나홍진은 물리적 감각을 살리는 데 유독 능한 감독이다. 칼이 살을 파고드는 무게와 비릿한 냄새, 뼈에 부딪히는 둔탁함, 그리고 화면 어딘가에 늘 배어 있는 공기의 습도. <황해>는 눈으로 보는 3차원을 넘어 피부에 닿는 습기와 코를 찌르는 비린내까지 전해오는, 말하자면 5D의 영화다. 유독 선명한 이 현실감은 공간에만 드러나지 않는다. 개체를, 그러니까 인물 하나하나를 감독 나홍진은 똑같은 밀도로 붙잡는다. 그래서 이 영화의 사람들은 유난히 선명하다. 언제나, 이것은 나홍진의 인장과도 같다.
주인공 구남은 조선족이다. '조선족 새끼'라는 말을 들으면 피가 끓지만, 정작 한국으로 넘어온 뒤의 그는 철저한 외부인이다. 이 땅에서 그는 날개를 펼치지 못한다. 김승현 교수가 함부로 건물에 들어온 구남을 보고도 조선족이라는 이유로 눈감아 주고 용돈까지 쥐어주는 대목이 있는데, 그것은 호의가 아니라 선민의식과 우월감에서 나온 적선이다. 구남을 대하는 세상의 태도가 그 짧은 순간의 태도 하나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흥미롭게도 구남은 내내 쫓기면서도 자신이 왜 쫓기는지 정확히 알려 하지 않는다. 어쩌면 '조선족'이자 '외부인'이라는 열등감이, 진실을 캐물을 자격조차 스스로에게서 거두어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생활이 어쩌면 당연한 거야 라며 지레 생각해 버리고 탐구를 시작하지도 않는. 그가 원하는 것은 단 두 가지, 아내의 행방을 확인하는 일과 청부받은 김승현을 처치하는 일뿐이다. 그러나 계획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꼬인다. 범행을 실행하러 간 자가, 하필 자신이 계획한 바로 그 방식으로 벌어진 범행의 목격자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는 세 사람이 있다. 구남과 면가와 태원. 외모와 성향을 거칠게 구분하면 이렇게 정리된다. 구남은 어울리게 생겼지만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고, 면가는 어울리게 생겼고 실제로도 어울리는 인물이며, 태원은 어울리지 않게 생겼지만 어울리는 인물이다. 그래서 <황해>에서 면가는 상수였고, 태원은 변수였으며, 구남은 고래 싸움에 등이 터지는 작은 새우였다. 구남은 전형적인 초식동물이다. 험한 세상에 태어난 탓에 제 몸 하나 지킬 무력은 갖추었으나, 더 큰 판을 보지 못하고 눈앞의 생사만을 좇는다. 생존욕은 아마도 육식동물보다 초식동물이 더 질길 것이다. 이 영화에서 구남이 어쨌건 가장 오래 살아남은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반면 면가는 날 때부터 육식동물로 태어난 존재다. 압도적인 자신감을 지녔기에 두려운 것이 없고, 두려운 것이 없기에 아첨할 대상도 없다. 구남이 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토록 처절하게 발악했다면, 면가는 목숨을 위협받는 처지도 아니면서 오직 '자신의 것'을 되찾겠다는 이유 하나로 구남에 맞먹는 광기를 뿜는다. 그것을 손에 넣지 못한대도 당장 죽는 처지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을 좇는 길이 죽음과 가까운 길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면가는 지나치게 순수한 짐승이다.
가장 흥미로운 자는 태원이다. 그는 대외적으로 멀쩡한 직책을 가졌고, 젠틀한 외모에 늘 차분한 언행을 유지한다. 그러나 그 모두는 가면이며, 실상은 살인 청부도 서슴지 않는 조직폭력배의 두목이다. (극장판과 감독판 모두에서 유독 튀는 태원의 베드신이 기어이 들어간 것은, 매끈한 대외적 가면 아래 도사린 그의 짐승스러움을 슬며시 내보이려는 장치였을 것이다.) 다만 그는 면가처럼 육식동물로 '태어난' 자는 아니어서, 상대를 봐 가며 처신하는 강약약강의 얼굴을 함께 지녔다.
구남은 이 거친 세계의 상수인 면가의 존재는 진작 알고 있었지만, 변수인 태원의 존재는 영화가 거의 끝날 무렵에야 겨우 알아차린다. 구남은 언제나 가장 나중에 아는 자였다. 행동하기를 망설이지는 않으면서도, 정작 자신이 어떤 판 위 어떤 자리에 놓여 있는지는 끝내 파악하지 못하는 인물. 그래서 구남은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난생처음 '앎'을 향한 여정을 택한다. 지금껏 쫓기며 달아나던 방향을 거슬러, 이번에는 제 발로 진실을 찾아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의 끝에서 그가 마주하는 것은 자신이 찾던 진실보다 훨씬 크고 추악한 진실이었다. 자신이 줄곧 죄책감을 품어 온 대상이, 실은 자신이 분노를 품어 온 대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는 것. 세상은 늘 구남이 그어 둔 울타리 너머에 진짜 얼굴을 감추고 있었고, 그는 죽는 순간까지 철저하게 모르는 자로 남는다. 관객에게는 습도와 냄새까지 만져질 만큼 선명한 이 세계였고, 정작 그 한복판을 살아가는 구남에게는 끝까지 희미한 안개같은 세계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