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식을 앞두고 수녀원을 잠시 나와 간 이모부의 집은 젖을 짜는 목장이 달린 저택이다. 겁을 먹으며 시도조차 못 하는 비리디아나. 그곳은 말하자면 자신이 지금껏 살아왔던 세상과 이격된 수녀원과 정반대인, 완전한 '세상'의 공간이다. 예수는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내려왔다. 비리디아나는 예수의 행적을 밟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여, 그녀가 예수가 될 수 있을까?
옷을 갈아입는 비리디아나의 장면은 '그럴 의도 없었다'는 듯 감독의 능청스런 관능의 시선이다. 그녀는 수녀이고, 그 순간 그녀의 행동에는 (누군가를 유혹하겠다는 등의) 어떠한 의도도 담겨있지 않지만 그 장면에는 미묘한, 그렇지만 분명한 관능의 정서가 담겨 있다. 그녀는 (말하자면 공식적으로) 성녀이기에 관객은 이 순간 거의 죄책감에 가까운 정서마저 받게 된다. 루이스 부뉴엘은 이처럼 자신의 영화와 관련된 모든 인간들을 쥐고 흔든다.
결혼식 날 죽었다는 전 아내의 드레스를 비리디아나에게 입어달라는 이모부 조르주. 비리디아나를 기어이 손에 넣어 침대에 눕혔을 때, 마치 관에 누워 있는 시신을 연상케 하는 형상의 그녀. 분명 그 순간들에는 네크로필리아적 모티프가 담겨 있다. 조르주가 비리디아나에게 끌리는 까닭은 그녀가 자신의 아내를 닮았기 때문이라는 말인가. <현기증>에 대한 유럽의 대답이라고까지 말하고 싶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수녀'의 삶을 살기엔 어려운 오점을 남긴 비리디아나. 그러나 그녀에겐 속죄와 희생의 방식이 되었을 수도 있을 행동마저 선택지에서 사라졌다. 조르주가 스스로 목을 매 '선수를 친' 것이다. 그녀는 내세로 도망칠 수도 없이 이 땅에서 남은 삶을 살아야 하는 운명인 것이다. 수녀원에 돌아가지 않고 혼자서 주님의 길을 가겠다고 그곳에 찾아 온 원장에게 고하는 비리디아나를 두고 원장은 "오만하다"라며 우려한다. 저택은 곧 조르주의 사생아였던 호르헤라는 새 주인을 찾았지만, 비리디아나는 그곳을 '낮은 자들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하려 한다.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그들이 사회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일을 시킨다. 그들을 저택의 공간에 모아 식사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작업 도중 다같이 기도하는 장면이 그렇듯, 비리디아나는 그들을 '주의 이름으로' 바꾸려 한다. 그러나 그녀의 노력은 반나절 만에 '무의미'했던 것임이 드러난다. 그녀와 호르헤 일행이 모두 저택을 비우자 그 부랑자들은 영역을 침범해 집의 내부를 마음껏 헤집어 놓고 급기야 ('최후의 만찬'을 명백히 패러디한 구도와 함께) 게걸스러운 식사와 함께 저열한 파티의 공간으로 그곳을 일순간 바꾸어 놓기에 이른다. 이른 귀가로 인해 그 현장을 목격한 호르헤와 비리디아나는 본색을 드러낸 그들에 의해 고초를 겪기도 한다. 그녀는 속된 땅에서도 성(聖)의 평강을 전하려 하였지만, 면류관은 불에 던져지고 그녀 역시 포기한 채 여느 유곽 도박장의 공간 같은 곳의 일원으로 전락한다.
한낱 인간이 신의 권능을 행하려 하는 것은 오만이다. 또한 낮은 자들을 한낱 인간이 변화시키려 하는 것은 오만이다. 모든 낮은 자가 선한 자는 아니다. 모든 낮은 자가 욕망이 없는 자는 아니다. 영화가 비판하는 것은 바로 그 선입견과 오만에 관한 것이다. 라스 폰 트리에 이전에 루이스 부뉴엘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