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론적인 것을 다시금 짚어보고 싶은 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당연한 말이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해원이다. 복남이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가져간 면이 있지만서도 말이다. 영화의 주인공이란 흔히 ‘변화하는 자’를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복남은 주인공이 아니다. 복남은 상수이자 환경과 같은 존재다. 사실 복남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돌변하는 듯 보이지만, 이전에도 탈출을 시도했다는 언급이 지나가듯 등장하는 것을 떠올려보면 그녀는 늘 이 섬을 벗어나려 했던 인물이다. 다만 번번이 좌절되었을 뿐이다. 반면 해원은 이 사건을 경계로 명확하게 변한다. 해원의 입장에서 이 모든 일은 한여름밤의 악몽처럼 느껴질 것이다. 아니, 정말로 그 모든 메인 스토리가 꿈일지도 모른다.
어떤 한 사건, 혹은 한 번의 죄책감, 혹은 한여름밤의 한 악몽은 한 사람이 삶을 바라보는 태도를 통째로 바꿔놓을 수 있다. 과거의 해원은 주저함 끝에 증언을 했지만, 위악에 겁을 먹고 금세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이제의 해원은 다르다. 섬에서의 죄책감을 평생 짊어진 채, 주저하지 않고 증언이 필요한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 변화야말로 이 영화가 끝내 해원의 이야기로 귀결되는 이유일 것이다.
본작을 지배하는 정서는 단연 아이러니다. 우선 미술적인 차원에서 강하게 드러난다. 끔찍한 광경들이 영화를 집어삼키는 와중에도, 동시에 등장하는 목가적이고 아름다운 이미지들은 잔인할 정도로 이질적이다. 그 지긋지긋한 섬을 벗어나려는 복남의 탈출 장면이 역설적으로 너무나 아름답게 묘사되는 것 역시 그렇다. 가스라이팅에 취약한 격리된 공간에서, 가족에게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임에도 그의 ‘사랑’을 받고 싶어 빨리 가슴이 커지고 싶다고 말하는 어린 연희의 순간 역시 마찬가지다. 이 영화가 얼마나 잔혹한 방식으로 아이러니를 축적해왔는지를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가장 상위에 위치한 광기는 어쩌면 ‘선한 얼굴을 한 광기’일지도 모른다. 최후반부 복남이 칼을 핥는 장면은 사전적인 의미의 광기에 가깝게 느껴지지만, 이 영화의 진정한 광기는 그녀가 아니다. 순박한 얼굴을 한 채 사악한 본성을 숨긴 마을 주민들이다. 그들은 연희의 죽음 앞에서 가증스러운 눈물을 흘리고, 복남이 철종과 만종에게 학대당하는 사실을 알면서도 뒤틀린 남성중심적 사고로 그것을 외면하고 합리화한다. 공권력 앞에서도 진실을 은폐하고, 끝내 피해자를 탓한다. 어쩌면 연희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가장 큰 원흉 역시 이들이었을지도 모른다.
필름메이킹의 윤리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이 영화의 강도 높은 수위가 직접적으로 묘사되는 것이 옳았는지에 대한 논의는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그런 논의를 잠시 차치하더라도, 이 영화가 이룬 분명한 성취가 있다. 그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이 영화가 묘사하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이상하지 않다’, ‘충분히 일어날 법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그곳에선 이상한 일이 아니다’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의 공간 전체에 깔린 미친 분위기를 창조해낸 것은 온전히 감독의 공로다. 매우 극단적인 소재들이 등장함에도 그것이 자극을 위한 자극으로만 전락하지 않고 이야기 속에 스며들 수 있었던 이유 역시, 감독이 이 소재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가 끝까지 분명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