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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오클라호마주 오세이지 부족 땅에서 석유가 발견된 후, 부족 사람들이 한 명씩 죽어 나가자 FBI가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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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고 검은 피로 세워진 이 땅의 역사를 반추하는 고발의 이미지와 참회의 보이스
백인들에게 헤게모니를 빼앗기는 현실에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 의식을 드리는 인디언들. 착잡한 마음과 함께 그들의 유산을 땅에 묻는다. 그러나 파이프를 땅에 묻자, 땅에서 응답하듯 그들의 대지에서도 검은 눈물이 터져나온다. 그렇게 고향을 잃었던 이들은 이 땅에서 제일가는 부호가 되었고, 그들을 그들의 고향에서 몰아냈던 이방인들은 그들을 다시 한 번 몰아내러 그곳으로 향한다.
마틴 스콜세지의 <플라워 킬링 문>은 50년이 넘는 경력을 가진 그의 첫 번째 서부극이다. <좋은 친구들>이 떠오를 정도로 씬에서의 앙상블이 초반부터 눈을 사로잡는다. 말 타는 서부극이 아닌 차 타는 서부극으로서의 이 영화는 거장의 필모그래피에서 낯선 순간이며, 장르의 역사를 보더라도 익숙치 않다. <플라워 킬링 문>은 서부극을 상징하는 것들이 당연히도 존재하지 않는다. 카우보이 모자도 없고, 강렬하고 피가 튀기는 총격전도 없다. 서부극의 유산은 원심력의 에너지였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며 그 유산은 폐단이 되어 장르의 소멸을 불러왔다. 21세기 들어 서부극은 변화를 보여준다. 사장된 장르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기 위해 예술가들은 원심력 대신 구심력을 택했다. 외적이고 테스토스테론 가득한 액션보단 인간의 내면으로 끝없이 침투하는 심리극에 가까운 형태로 21세기의 서부극은 진화해갔다. 앤드류 도미닉의 <비겁한 로버트 포드>가 그랬고 제인 캠피온의 <파워 오브 도그>도 그랬다. 말하자면 <플라워 킬링 문>은 그들과 결을 같이 하는 모던 웨스턴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프로덕션 디자인은 잭 피스크가 맡았다.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테렌스 맬릭의 거의 모든 영화에 참여했고, 폴 토마스 앤더슨의 두 최고작 <데어 윌 비 블러드>와 <마스터>에 참여한 등의 이력이 있는 프로덕션 디자이너이자 미술 감독이다. 어떤 디자이너보다 이 땅의 생동감을 밝히 보여주는 것에 탁월한 예술가이기에, <플라워 킬링 문>의 공간감은 스콜세지의 영화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형태의 것이었지만, 또 그만의 방식으로 선명했다.
어니스트의 등장은 기차를 타고 오클라호마에 내리는 모습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장면을 통해 <플라워 킬링 문>은 어니스트를 비공식적으로 '외부인'으로 상정한다. 그러나 그가 삼촌의 집에 도착하자 삼촌 빌은 "고향에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며 그를 맞이한다. 공식적으로 어니스트는 오클라호마의 내부인이다. 본작에서 어니스트의 위치는 비공식적인 위치가 더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어니스트는 어디에도 온전히 속해있지 못한 인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얀 피부색에, 킹이라 불리는 인물을 삼촌으로 두고 있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어떤 백인들보다 '진심으로' 오세이지족을 아꼈다.
빌은 망설이지 않는 빌런이며 어니스트는 망설이는 빌런이다. 빌 헤일은 스콜세지의 또다른 도살자처럼 보인다. 스콜세지의 필모그래피에서도 손꼽을 수 있는 빌런일 것이다. 반면 어니스트는 모든 행동들에 우유부단하고 후회의 찌꺼기를 가지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삼촌과 같은 야망은 없으며 그저 술과 여자를 마음껏 즐기고픈 소박한 욕망만을 가진 듯한 그저 그 정도뿐인 소시민. 그러나 그 역시 악인일 뿐이다.
영화의 로버트 드 니로는 다시금 그의 최고를 보여주었다. 사실 나는 <아이리시맨>을 보고선, (영화의 이야기가 그렇기에 당연했겠지만) 이제는 그의 '열정적임'을 보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본작을 보고서 그러한 나의 판단이 얼마나 근시안적인 졸견이었는지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오세이지족을 장악하는 그의 행동들은 노련한 늑대처럼 보였고 한편으론 마치 30여년 전의 맥스 케이디 같았다. 이 영화에서 디카프리오의 연기 역시 훌륭하다 말하기에도 입 아픈 수준이었지만, 두 주인공이 나란히 등장하는 모든 장면들에서 드 니로는 디카프리오를 그야말로 잡아먹었다. 특히 서로 마지막 인사를 건내는 장면에서, 쇠창살의 그림자를 드리운 드 니로의 모습에 나는 소름이 끼쳤다. 여든의 노인이 이런 에너지를 끌어낼 수 있다는 것에 존경을!
추가적으로 몰리 역의 릴리 글래드스톤. 고백하자면 이전까지 전혀 몰랐던 배우였지만, 짊어진 짐이 많았을 배역임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연기라 말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영화는 두 개의 엔딩이 있다. 먼저 첫 번째 엔딩. (결과는 매번 다르지만) 스콜세지의 주인공은 종래에 이르러 구원의 길로 향한다. 어니스트 또한 그렇다. 결국 삼촌 대신 가족을 선택하며 모든 증언을 진실로 답하지만, 그의 증언과는 배반된다 느낄 정도의 '몰리를 향한 사랑'. 어니스트의 사랑은 진심이었다. 이 비논리적인 사랑.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리와 다면한 재판 이후에서 그녀에게 완벽한 진실을 말하지는 못하는 어니스트. 어니스트의 회개는 이루어졌지만, 그것이 그의 완전한 구원을 가져오지는 못했다.
그리고 병렬되는 두 번째 엔딩. 실화인 그들의 후일담은 돌연 극중극의 형태로 소개된다. 스콜세지는 직접 등장해 자신의 목소리로 구술하여 그녀와 그들을 기리는 동시에, 비극의 역사를 '재현'해 스크린에 담아낼 수는 없다는 책임의식을 보여준다. 윤리적으로도 불가하며, 재현으로는 절대 그 비극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는 확신. 한 예술가의 책임의식과 함께, 21세기 아메리카 대륙을 사는 '백인'들에게 자성을 요구하는 메시지로도 읽을 수 있을까. 21세기 아메리카를 사는 지금의 그들에겐, 오세이지족 연쇄살인 사건은 마치 영화의 마지막처럼 그저 구전으로 전해지는 하나의 이야기일 뿐일 테니 말이다.
말하자면 <플라워 킬링 문>은 닫으면서 시작하고, 열면서 끝낸다. 영화의 최전방은 그들의 유산을 닫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최후방은 그들의 생명을 아름답게 열며 (정확힌 영원히 살려놓으면서) 끝낸다. 꽃과 비. 형형하게 느껴지는 생명력. 그들의 생명력이 꺼지질 않길 바란다는 마음으로.
나는 스콜세지가 <아이리시맨>으로 그가 할 모든 이야기를 마쳤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러나 <플라워 킬링 문>을 보고서, 그의 나이 여든에 또다시 그의 새로운 막이 열린 듯한 느낌마저 받았다. 그에게는 여전히 이야기가 남았다. 스콜세지 영감님, 부디 만수무강하시길.


























































































































































































































































































































































































































































































































































































































































































